엄마 역할을 주로 한다. 엄마라고 하나 한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윤시내를 흉내 내는 밤무대 가수 연시내로 활동하며 꿈을 버리지 않는 중년 여성(영화 ‘윤시내가 사라졌다’), 건설사 사장 아들을 둔 권위적이고 냉혹한 부잣집 마나님(드라마 ‘더 글로리’), 또래들과 유명 트로트 가수가 다닌 곳을 ‘성지순례’하는 흥겨운 노년 여성(영화 ‘파일럿’) 등 다채롭다. 철없는 모습이 웃음을 빚어내는 한편 냉기 어린 표정으로 섬찟함을 만들어낸다. 배우 오민애(59) 안에는 많은 ‘엄마’들이 산다.
오민애는 요즘 가장 눈에 띄는 중년 여성 배우로 손꼽힌다. 올해 드라마 ‘돌풍’에서 영부인을 연기해 눈길을 끌었고, ‘파일럿’은 올여름 최고 히트작(4일 기준 관객 454만 명)이다. 지난달 28일에는 또 다른 출연 영화 ‘한국이 싫어서’가 개봉하기도 했다. 오민애를 5일 서울 동대문구 한 공유오피스에서 만났다.
오민애의 최신작은 지난 4일 개봉한 ‘딸에 대하여’다. 소설가 김혜진의 같은 제목의 인기 소설을 바탕으로 한 독립 영화다. 오민애가 연기한 오주희는 요양병원에서 노인을 돌보며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이다. 허름하지만 이층 양옥집을 소유했고, 외동딸(임세미)을 다 키워 인생의 큰 고비는 다 넘긴 듯하나 주희의 삶은 평탄치 않다. 직장에서는 노동에 시달리는데, 딸아이는 여러모로 마음을 괴롭힌다.
어느 날 딸이 동성 연인과 집에 들어와 살면서 주희의 마음속은 전쟁터가 된다. 주희는 다정다감하고 옳은 일을 하려는 마음 넓은 사람이나 딸에게는 한없이 보수적이다. 오민애는 인간의 숙명적인 다면성을 섬세하게 표현해내며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오민애는 “외향적인 제 성격에 맞는 역할들만 해왔는데 주희는 저와 많이 다른 인물로 해보지 않은 역할이라 각본을 읽고 바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주희는 얼핏 보면 감정 표현을 안 하는 인물 같다”며 “서있는 것 같은데 분명히 움직이는 식의 연기를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오민애는 연극 무대에서 오래 단련된 배우다. 그의 연기 입문 계기는 좀 엉뚱하다. 1992년 인도 배낭여행을 하기 위해 여행사를 찾았다가 배우가 됐다. 서류를 작성하던 여행사 직원이 “연극 배우죠”라고 무심코 던진 질문이 연기 인생의 시작이었다(그는 당시 상황을 1인 다역 목소리 연기로 재현했다). 직원은 “카리스마 있는 얼굴이라 배우인 줄 알았다”며 “관심 있으면”이라는 전제로 극단 소개까지 해줬다. “무모한 성격”인 오민애는 "대학로도 모르면서" 바로 다음 날 극단 스태프로 합류했고, 배우 생활로 이어지게 됐다. 27세 때였다. 인도 배낭여행은 그때도 그 후로도 가지 못했다. 오민애는 “대신 연기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작품 하나가 끝나고 생긴 피로를 ‘여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오민애는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가장 역할을 하기 위해 학업을 일찌감치 중단했다. “우유 배달에 신문팔이(배달이 아니다), 술집 웨이트리스 등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연극배우가 돼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름 때문에 삶이 힘겨운 것일 수 있다”고 판단해 10년 동안 예명 ‘오주희’(‘딸에 대하여’의 이미랑 감독이 이 이름을 배역에 활용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로 활동하기도 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 택한 이름 때문인지 생각지 못한 삶이 다가왔다. 결혼을 했고, 아들을 얻었다. 늦게나마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했고, 대학원 진학까지 했다. 연극 ‘아리랑’ 주연을 맡으며 연출가의 고집으로 다시 오민애로 돌아와야 했지만.
연극에서 영화와 드라마로 고개를 돌린 시기는 2018년이다. 공연예술인노동조합 일을 할 때다. ‘미투’가 연극계를 뒤흔들었다. 오민애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다”며 “연극과 정을 떼고 싶었다”고 돌아봤다. 아들 교육비 마련이라는 경제적인 이유가 겹치기도 했다. “3년 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영화 연기에만 최선을 다해보자고 생각했다"고 그는 말했다.
오민애는 역할을 맡으면 참고할 만한 인물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제 마음속에서 인물들을 뽑아낸다”고 했다. “제가 연기한 캐릭터는 다 제 경험에서 나왔다”며 “캐릭터들 중 제가 아예 아닌 인물들은 없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면서 겪은 이러저러한 일들이 연기 자양분이 됐다는 거다. 하고 싶은 역할이나 목표는 딱히 없다. 그는 “인간의 선악미추를 제대로 표현하고 싶은 욕심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