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무려 72명의 사망자를 낸 영국 런던 공공아파트 그렌펠타워 화재의 원인 및 책임 규명을 위한 최종 보고서가 4일(현지시간) 발표됐다. 비용 절감을 위해 가연성 소재로 건물을 뒤덮은 건설 회사, 위험성을 알면서도 눈을 감은 정부와 인증 업체, 세입자 안전은 뒷전에 둔 건물 관리자가 합작한 '총체적 인재(人災)'였다는 게 참사 7년 만에 나온 결론이다. 화재 당시 영국 언론이 한국의 세월호 침몰 참사(2014년)에 빗대 '영국판 세월호'라고 표현했던 평가가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유가족은 "죽지 않았어야 할 이들이 죽었다"며 통곡했고, 영국 정부는 '국가'의 이름으로 사과했다.
참사는 2017년 6월 14일 새벽 발생했다. 런던 노스켄싱턴에 있는 24층짜리 그렌펠타워 4층에 있던 냉장고에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다. 화마는 72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7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렌펠타워는 1960, 70년대에 영국이 높게 지어 올린 임대주택을 민영화한 곳으로, 거주자는 대부분 저소득층이나 이주민 등 '서민'이었다.
초대형 참사 원인 파악을 위해 꾸려진 조사위원회는 2년 후인 2019년, 1차 보고서를 통해 '2015년 건물 외벽 단장 과정에서 사용된 가연성 소재가 화재 규모를 키웠다'고 밝혔다. 이날 공개된 약 1,694쪽 분량의 최종 보고서는 '수십 년에 걸쳐 켜켜이 쌓인 부정과 무책임, 무능이 참사를 초래했다'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영국 BBC방송·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조사위는 미국 자재 기업 아코닉이 화재 위험을 충분히 인지했으면서도 가연성 클래딩(금속을 접합해 만든 건축용 자재)을 건물 외벽에 대거 활용했다고 봤다. 다른 나라와 달리 영국에는 해당 소재 사용에 대한 규제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화재 위험성도 고의로 은폐했다. 단열재 등을 납품한 여타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NYT는 "비용 절감 노력이 거주민 안전보다 우선시됐다"고 지적했다.
정부 책임도 만만치 않았다. 위험 요소를 걸러낼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화재 위험을 1992년 영국 머지사이드주의 유사 사고를 계기로 이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사위는 "아무런 조치도 없었던 점을 이해할 수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세입자 안전 관리 책임이 있는 임차인관리기구(TMO)도 '안전 불감증'에 걸려 있었다. 안전 문제를 제기하면 '악성 민원인'으로 취급했다. 한 명뿐이었던 화재 위험 관리 직원은 관리 능력·자격이 없었다. 런던 소방 당국은 고층 건물 화재 대응이 어렵다는 점을 알면서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
마틴 무어 빅 조사위원장은 "무능과 부정, 탐욕이 그렌펠타워 참사를 만들었다"며 "(72명) 모두의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게 단순한 진실"이라고 말했다. 불가피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이날 의회에서 "국가가 '국민 보호'라는 가장 근본적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국가를 대표해 사과한다"고 밝혔다. 생존자 및 유가족으로 구성된 '그렌펠유나이티드'는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런던경찰청은 조사위 결론을 이어받아 2026년 기소를 목표로 수사를 이어갈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