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 // 아름다운 이마를 맞대고 /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는 할머니들 // 펼치면 넓어지는 것 / 이야기 속의 벌판은 넓었고 // 멈출 수가 없었지 / 벌판엔 없는 것이 없었고 // 나를 좀 끼워줄래 // 나를 끼워주는 할머니들 (하략)”
시인 신해욱의 시집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에 실린 ‘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입니다. 지난달 나온 시집을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할머니가 할머니의 뒤를 밟고 있다”(‘자율 미행’) “누가 할머니를 찾고 있다”(‘속이 깊은 집’) “할머니. 약손을 좀 빌려줄래”(‘호산나’) 등 할머니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왜 하필 할머니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지난달 9일 서울 종로구 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열린 신 시인의 시 낭독회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신 시인은 “할머니가 2016년에 돌아가셨다”면서 “어렸을 때 할머니 손에서 양육이 됐기 때문에 돌아가셨을 때 마음이 각별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라고 부를 대상이 사라졌고, 그래서 할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을 처음에는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덧붙였죠.
그렇다면 시 속의 할머니는 시인의 할머니로 ‘해석’하면 되는 걸까요. 신 시인은 그러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할머니라는 호명이 들어오도록 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저 시적 존재일 뿐 현실의 할머니가 아니라는 건데요. 이쯤에서 알쏭달쏭해집니다.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요. 사실 시를 읽을 때마다 무심코 국어 시험처럼 의미를 찾아내려는 분들이 저를 포함해 적지 않죠. 그런데 평론가처럼 명쾌한 해설을 해내진 못하면 뭐 어떤가요. 그저 할머니의 아름다운 이마를, 또 그가 풀었을 이야기를 상상해 보는 찰나의 순간이 곧 시이자 문학인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