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서쪽 100km 거리의 자오칭(肇慶)으로 간다. 가랑비가 내려 약간 쌀쌀하다. 12월 중순인데 15도다. 습기 많은 영남의 겨울은 온도계보다 더 춥다. 두꺼운 옷 껴입은 사람이 많다. 버스 시간이 남아 터미널 부근 호반으로 간다. 총 20km에 이르는 제방이 호수를 여섯 군데로 나눴다. 봉우리가 곳곳에 솟은 모습이 별과 같다는 성호(星湖)다.
산책길에 꽃이 화사하게 폈다. 꽃잎을 검색하니 부겐빌레아(Bougainvillea)다. 중국어로는 예쯔화(葉子花), 꽃말이 정열이어서 추위가 가시는 기분이다. 향기가 은은해 해맑은 친구가 나란히 발걸음을 옮기는 듯하다. 겨울 옷과 마스크까지 쓴 아주머니가 꽃을 매만지고 있다. 숙박시설과 식당, 카페가 많다. 따뜻한 날이면 시민들이 나와 풍광을 즐길 듯하다.
건너편으로 아파트가 보인다. 날씨 탓인지 호반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새가 많다. 8만㎢가 넘는 호수와 봉우리가 펼치는 전망이다. 카르스트 지형의 봉우리도 많다. 북두칠성처럼 7개가 줄줄이 연결돼 있는 관광지가 있다. 봉우리마다 당연히 이름이 다르다. 제방이 연결돼 있어 걸어가도 된다. 유람선도 있다. 자연 풍광이 독특해 최고 등급인 5A급 관광지다. 버스 시간이 정해져 있어 아쉽다.
제단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골목에 자주 등장하는 지신(地神)이다. 당방두사(當坊頭社)라 적혀 있다. 사(社)는 토지신을 봉공한다. 당방토지는 해당 지역을 관장하는 토지신 혼령이다. 우두머리를 향한 제례라 좀 크다. 풍작을 기원하며 가정의 안녕도 도모한다. 공공십분진공도(公公十分真公道)와 포포일편호포심(婆婆一片好婆心)이라 새겼다. 매우 공평한 아버지와 오로지 자비로운 어머니다. 가는 곳마다 민간신앙과 만나는 현대 중국이다.
광둥 중북부 칭위엔(清遠)으로 간다. 자오칭에서 동북쪽으로 2시간 거리다. 롄난(連南)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탄다. 160km 거리를 3시간 동안 달린다. 소수민족인 야오족자치현(瑤族自治縣)이다. 다시 택시로 난강촌(南崗村) 산골에 위치한 천년요채(千年瑤寨)로 간다. 비가 오다 그치고 흐리더니 다시 내린다. 해발 800m 비탈에 옹기종기 천년 세월을 지켜온 산채의 윤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무와 바위에 새긴 표지판이 환영해 준다.
객잔을 찾아 비탈을 오른다. 민가와 식당이 다닥다닥 붙어서 지붕 아래로 비를 피한다. 미끄러운 계단을 다시 올라 예약한 객잔으로 들어간다. 전망 좋은 방으로 골랐다. 넓은 창문 밖으로 테라스도 있다. 시선 아래로 카르스트 봉우리가 무한하게 펼쳐진 절경이었다. 전망 최고를 원했기에 가장 비쌌다. 이름조차 매혹하는 공중관경객잔(空中觀景客棧)이다. 하룻밤에 약 9만 원이다. 테라스로 나가니 백지에 그린 듯한 산수화가 펼쳐진다. 여행자의 가장 속 좁은 말은 날씨 탓이다.
홍수전전교옥(洪秀全傳教屋)이 바로 옆에 있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민란을 주도한 인물이 아닌가? 1814년 태어난 홍수전은 어린 시절부터 사서삼경을 배웠다. 1837년 또 다시 과거에 낙방한 후 낙심을 견디지 못하고 열병에 걸렸다. 40일 동안 의식불명 상태였다 깨어난 후 다시 태어난 듯 놀랍게 변신했다. 1832년 양발이 발간한 성경 발췌본 권세양언(勸世良言)을 통해 기독교와 만난다. 1843년 배상제교(拜上帝敎)를 창립하고 포교를 시작한다. 먼저 광저우 인근 10개 현을 다닌다.
1844년 3월 28일 홍수전이 포교를 왔다. 배상제교 창립 멤버인 풍운산과 동행했다. 유교경전과 역사, 천문과 지리, 역법과 산술, 병법에 뛰어난 인물이다. 홍수전 동상 뒤로 두 사람의 초상화와 소개가 적혀 있다. 광둥을 거쳐 광시까지 영역을 넓힌다. 드디어 1851년 1월 교도를 소집해 광시의 진톈에 집결하고 반청무장봉기의 깃발을 높이 든다. 민란의 기폭제인 금천기의(金田起义)다.
홍수전이 쓴 시가 있다. 오랜 기간 과거를 준비한 탓에 필체가 예사롭지 않다. 반듯하고 단호하다. 자신의 사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우리의 죄악은 실로 하늘까지 닿을 정도다(吾儕罪惡實滔天)’로 시작한다. ‘다행히도 예수가 대신 모두 갚았다(幸賴耶穌代贖全)’고 한다. 사탄과 상제, 천당과 지옥도 등장한다. 교리를 세우던 초기에 쓴 시다. 감정 절제가 아쉽다. 시인도 습작부터 시작하고 혁명가도 시작은 미미하다.
나란히 요로의사청(瑤老議事廳)이 있다. 붉은 두건을 두른 노인 5명이 앉아 회의 중이다. 원나라 시대부터 공동체를 운영하던 제도다. 1년에 한 번 순번대로 추천을 통해 선발한다. 주로 노인이라 요로제라 부른다. 대소사를 주재하며 중대사건이 생기면 전체 주민회의도 소집한다. 깊은 산골이라 관청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 산채의 안녕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슬기로운 지혜였다.
천장공(天長公)이 수뇌다. 산채를 대표해 내분을 처리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관리한다. 일반 회의는 물론 전체 회의도 소집한다. 두목공(頭目公)은 실제 발생하는 사무를 담당하며 천장공을 보좌해 분쟁을 해결한다. 장묘공(掌廟公)은 종교 사무와 제례 활동을 준비하고 책임진다. 소향공(燒香公)은 사당 정비를 담당하며 조상에 대한 분향을 책임진다. 방수공(放水公)은 식수와 논밭의 관개를 담당한다. 생생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둘러앉은 노인을 보니 천년을 살아온 민족의 고뇌가 느껴진다.
화강암으로 만든 석관이 보인다. 요로제는 청나라 도광제 시대인 1832년까지 시행됐다. 천장공은 부족장인 요장(瑤長)이 맡았다. 요왕(瑤王)이라 부른다. 6번째 요장이자 마지막 요왕 덩마이웨이바궁(鄧賣尾八公)을 위한 무덤이다. 1901년 생으로 공정한 법관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신중국 정부가 들어서자 현의 참사와 인민법원 부원장을 역임한다. 1958년 농촌 현실을 무시한 대약진운동이 전국을 강타한다. 반우파투쟁이 진행되자 요장 신분이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이듬해 옥중 사망한다. 평생 청렴했기에 석관에 묻히길 원하지 않았다. 주인 없는 석관이었다. 문화혁명 때 파손돼 복원했다.
비탈을 따라 산채 꼭대기까지 오른다. 반고왕묘(盤古王廟)가 위치하고 있다. 여전히 흐리고 세찬 비가 내린다. 야오족 악기인 장고(長鼓)가 기둥처럼 세워져 있다. 가늘고 길게 생긴 북으로 춤 반주에 사용된다. 야오족 말로 왕더우(汪都)다. 장고를 목에 걸고 양손으로 두드리며 춤을 춘다. 장고무는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보존한다. 북을 다루는 타법이 36가지이고 춤 동작이 72가지에 이른다. 북과 춤이 어우러진 한바탕 흥겨운 무대가 떠오른다.
사당에 반고왕과 부인이 봉공돼 있다. 반고는 개천(開天)을 상징하는 달(月亮)을 받쳐 들고 있다. 부인은 벽지(辟地)를 상징하는 그릇(碗)을 두 손 모아 잡고 있다. 개천벽지는 천지개벽과 동의어다. 사람과 땅, 그리고 오곡을 창조한 신화 속 인물이다. 영남 일대에 널리 퍼진 야오족 신화다. 적국의 왕을 살해해 영웅이 된 반호(盤瓠) 이야기다. 원래 개였다. 공을 세우면 공주와 혼인을 시킨다는 언약이 있었다. 금종(金鐘) 안에서 인간이 되기 위해 49일 동안 수행한다. 공주는 염려하는 마음에 48일째 종을 열고 말았다. 거의 인간이 됐고 머리만 모자랐다.
왕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공주와 혼인해 영남으로 이주해 살았다. 남방왕으로 책봉돼 반왕(盤王)이라 불렸다. 서로 사랑하며 오래 살았으며 6남 6녀를 후손으로 남겼다. 모두에게 성(姓)을 나눠줬다. 수천 년 전 야오족은 모두 12성이었다. 소박하게 살았던 반왕은 자녀에게 농사와 수렵을 게을리하지 말라 가르쳤다. 야오족이 숭배하는 조상이다. 호(hù)는 발음이 변환돼 고(gǔ)가 됐다. 신화는 점차 중원 지방으로 유전됐다.
중국 민족의 공통 조상으로 승화됐다는 설명도 있다. 다소 의아하다. 반고 신화는 삼국시대부터 민간에 회자됐다는 기록이 있다. 야오족 신화와는 다르게 묘사된다. 1만 8,000년 전 우주가 혼돈하던 시기에 등장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 랴오닝성 진저우(錦州) 앞바다 섬에 필가산(筆架山)이 있다. 천지개벽의 땅이라는 표지석과 함께 반고 조각상이 있다. 용으로 감싼 몸에 얼굴은 기기묘묘하다. 부처의 윤곽인데 코 부위에 두 마리 용이 있고 눈 위치에는 연꽃 문양이 여럿이다. 인간의 얼굴인 천년요채와 사뭇 다르다. 어쩌면 더 신화다운 생김새다.
롄난 야오족은 8패(排)에 26충(衝)이다. 수천 명 이상의 큰 산채를 패라 하고 수백 명 정도의 작은 산채를 충이라 한다. 천년요채에 약 7,000명이 거주한다 하니 2~3패 규모다. 크고 작은 부근의 산마다 산채가 많다는 말이다. 돌계단 따라 내려가는데 빗물을 따라가듯 미끄럽다. 운무로 뒤덮여 있어 시야도 짧다. 기온이 점점 내려가 몸이 움츠러든다. 천년요채의 웅장한 모습은 없다. 운무에 꼭꼭 숨은 풍광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산채문을 지난다. 아치형 문을 따라 빨간 리본이 걸려 있다. 양쪽으로는 장고 춤을 추는 남녀가 있다. 여성의 머리에 닭 깃털이 보인다. 야오족의 장고가 생겨난 전설과 관련 있다. 옛날 옛적에 수령을 뽑아야 했다. 외적이 침략해 왔기 때문이다. 어느 날 굉장한 울림과 함께 하늘에서 한줄기 흰 빛줄기가 쏟아졌다. 커다란 바위에 꽂히더니 장검으로 변했다. 우두머리를 고르기 위한 시금석이었다. 모두가 힘을 썼으나 칼을 뽑지 못했다.
청년 둥비(冬比)가 힘껏 뽑고 수령이 됐다. 주민을 인솔해 반격을 시작했다. 싸울 때마다 승리해 외적을 물리쳤으나 마지막 순간에 희생됐다. 두건 위에 깃털을 꽂았다. 섬광을 일으켰던 장검을 상징한다. 깊은 산에서 가져온 오동나무로 장고를 제작했다. 손으로 북을 칠 때마다 ‘둥비둥비(咚比咚比)’ 소리가 났다. 의성어인 둥둥(咚咚)은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비비(比比)는 어떤 소리인지 오리무중이다. 반복해 소리가 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반고왕묘 벽면에 장검을 든 청년이 있던 이유다. 수령을 추모하기 위한 북과 깃털이다. 두 남녀의 복장이 빗속에도 선명하다.
민가 대문에 남녀 모두 깃털을 달고 있다. 대문을 지키는 문신은 아니다. 목에 장고를 걸고 손으로 두드리며 산들산들 춤을 춘다. 고운 얼굴의 아가씨와 착하게 생긴 총각이다. 천년 세월을 북 치고 춤추며 살아온 산채다. 비 맞으며 전설과 신앙도 살폈다. 맑게 펼쳐진 풍광과 밝게 드러난 문화를 보기 위해 다시 찾고 싶다. 둥둥 흥겨운 소리와 살랑거리는 율동도 함께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