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전 하와이 발칵 뒤집은 여대생 살인 사건… 진범은 재수사 직후 자살했다

입력
2024.09.06 04:30
13면
[세계의 콜드케이스]
<86> 1991년 데이나 아일랜드 살인 사건
'20대 백인 여성 사망'에 미국 전역이 주목
무고한 용의자 3명, 허위 자백 끝 유죄 선고
DNA 재수사 통해 23년 만에 무죄로 뒤집혀
올해 초 포착된 유력 용의자는 조사 후 자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올해 7월 23일 미국 하와이주(州) 힐로의 하와이안패러다이스 공원 인근 지역. 한 남성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자는 앨버트 라우로 주니어(57)로, 나흘 전 하와이카운티경찰국(HPD)에서 유전자정보(DNA) 검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33년 전 하와이를 발칵 뒤집었던 여대생 사망 사건의 새로운 용의자로 지목된 직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살인 현장서 DNA 나왔지만... '신원미상 남성 #1'

사건의 시작은 1991년 12월 24일 오후였다. 하와이주의 가장 큰 섬 빅아일랜드(하와이섬) 동쪽 끝 푸나 지구에 위치한 카포호 지역의 한 낚시터 근처 덤불에서 젊은 백인 여성이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 몇 ㎞ 떨어진 비포장 도로에는 차량에 들이받힌 것으로 보이는 자전거도 널브러져 있었다. 당시 23세였던 이 여성은 미국 버지니아주 출신으로 조지메이슨대를 갓 졸업한 데이나 아일랜드. 가족과 함께 휴가차 하와이를 찾았다가 봉변을 당한 아일랜드의 몸에서는 강간 및 구타 흔적이 있었고, 그는 이튿날 오전 힐로의료센터에서 사망했다.

금발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20대 백인 여성이 세계 최고 휴양지인 하와이에서 사실상 살해된 사건에 미국 전역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법피해자를 위한 비영리단체 '이노센스프로젝트'의 공동책임자 케네스 로슨은 CBS뉴스에 "피해자가 백인 여성일 땐 하와이 원주민이나 유색 인종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끌고, 수사 당국은 꼭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며 "그렇게 되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아일랜드의 시신 △아일랜드의 병원 이송에 쓰인 들것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티셔츠 등에서 DNA를 채취했다. 그러나 당시 구축돼 있던 DNA 데이터베이스에선 일치하는 정보를 찾지 못했다. 현장에서 수집된 DNA는 '신원미상 남성 #1'로만 저장됐다. 용의자 특정에 실패한 셈이다. 3년간 사건은 '미제'로 분류됐다.

그러다 1994년, 세 명의 남성이 경찰 용의선상에 올랐다. 별도의 성폭행·절도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3개월째 구금돼 있던 프랭크 폴린 주니어(당시 22세), 그리고 앨버트 이언 슈바이처(당시 23세)와 숀 슈바이처(당시 19세) 형제였다. 가장 먼저 용의자로 지목된 폴린 주니어는 "슈바이처 형제가 가해자"라고 경찰에 말했다.

허위 자백·위증·증거 불충분... 수사 난항에도 '종신형'

하지만 수사는 혼란을 거듭했다. 폴린 주니어는 1994년 6월 "이언과 숀이 범죄를 저지를 때 나는 차에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그러나 최소 일곱 차례의 심문에서 그의 증언은 구체적이지도, 일관되지도 않았다. 폴린 주니어가 슈바이처 형제와 갈등을 겪었다는 점도 그의 진술 신뢰성을 떨어뜨렸다. 이보다 한 달 전인 1994년 5월에는 폴린 주니어의 이복형 존 곤살베스가 수사기관에 "폴린 주니어가 범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코카인 소지 및 유통 혐의를 받던 곤살베스가 자신의 감형 대가로 내놓은 증언이었다.

어쨌든 1997년 검찰은 대배심 판단을 거쳐 슈바이처 형제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1년 후 이를 기각했다. 폴린 주니어뿐 아니라, 슈바이처 형제도 DNA 검사 등을 통해 혐의를 벗었기 때문이다. 부실 수사와 허위 자백, 위증 등이 초래한 결과였다. 예컨대 폴린 주니어는 1996년 7월 "내 이복형을 마약 혐의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경찰에 허위 진술을 했다"고 털어놨다. 숀도 "검찰 조사 때 살인 및 납치 혐의를 인정하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감형을 받으려는 목적이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인정하며 거짓 진술을 한 데 대해 엄청난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데 1999년 세 사람은 또다시 기소됐다. 그해 5월 '마이클 오르티즈'라는 이름의 교도소 직원이 "폴린 주니어와 슈바이처 형제, 3명 모두 내게 자백했다"고 증언한 탓이다. 이들과 함께 수감 생활을 했던 교도소 재소자들도 감형을 노리며 비슷한 진술을 수사기관에 제공했다.

결국 용의자 3명은 모두 2000년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언은 2급 살인 혐의로 징역 130년형, 납치 혐의로 20년형, 성폭행 혐의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폴린 주니어에겐 납치와 1·2급 성폭행 혐의로 180년형이 선고됐다. 숀의 형량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징역 18개월형과 보호관찰 5년형이었다. 이들은 줄곧 결백을 주장했지만 수사기관은 믿지 않았다. 심지어 피해자 부친이 판결 직후 슈바이처 형제의 아버지를 찾아가 "미안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비영리단체 도움으로 20여년 만에 '무죄'

2005년 감옥에 있던 이언은 DNA 분석 기술을 활용해 무고한 사법피해자를 지원하는 '이노센스프로젝트'에 도움을 요청했다. 2년 뒤 슈바이처 형제 변호 활동을 시작한 이 단체는 2010년 이 사건 진상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고, 하와이대 로스쿨 학생들도 힘을 보탰다. 여기에다 2015년에는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을 위한 사법서비스 기구인 '정의를 위한 판사들'도 가세했다. 당시 하와이 이노센스프로젝트 소속 자원봉사자 겸 변호사인 브룩 하트는 "하와이카운티 검사인 미치 로스와 연락하면서 사건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슈바이처의 변호인단은 법원에 '유죄 판결을 뒤집어야 한다'며 새로운 증거 및 정보를 제시했다. 2000년 유죄 판결 당시에는 아일랜드 시신 발견 장소에서 발견된 티셔츠에 아일랜드의 혈액이 너무 많아 '용의자의 DNA'를 분리해 내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 분리가 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사건 현장의 타이어 자국에 대한 전문가 분석도 추가했다.

대반전이 일어났다. 지난해 1월 피터 쿠보타 힐로법원 판사는 새 증거들을 모두 채택하며 이언에게 무죄 판결과 즉시 석방 명령을 내렸다. 쿠보타 판사는 이언에게 위로를 건네며 "이제 앞으로 인생의 3분의 1이 남았다. 어떻게 살아갈지는 당신의 몫"이라고 말했다. 숀에게도 같은 해 10월 무죄가 선고됐다. 다만 뉴멕시코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폴린 주니어는 2015년 다른 수감자에게 살해돼 누명을 벗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DNA 재수사로 '신원미상 #1' 특정… 경찰 조사 후 자살

진범을 찾으려는 노력은 재개됐고, 올해 초 전환점이 생겼다. 지난 2월 DNA와 공공 기록을 사용해 사람을 식별하는 소프트웨어 제조사인 '인디고솔루션스'와 하와이 이노센스프로젝트가 손을 잡은 덕이 컸다. 두 단체는 아일랜드 시신 발견 장소에서 3㎞ 떨어진 곳에 사는 남성을 추적했다. 조상·나이·유전적 특성·주소 내역을 기준으로 용의자 후보를 추린 결과였다.

경찰 재수사도 속도를 냈다. 올해 초 HPD는 1991년 수집된 DNA 중 티셔츠에서 나온 것을 다시 분석했다.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도 '신원미상 남성 #1'로 특정할 만한 사람들 명단을 경찰에 보냈다. 이들 중 한 명이 카포호 지역에 거주하던 앨버트 라우로 주니어였다.

수사 당국은 우선 라우로 주니어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뒤졌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다. 페이스북에서 그가 △트럭 운전에 익숙했을 것으로 보이는 해안 어부라는 점 △1990년대 초반 픽업트럭을 소유·이용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1991년 사건 발생 당시 "자전거 충돌 현장과 낚시터에서 픽업트럭을 봤다"는 목격자들 증언과 맞아떨어졌다.

라우로 주니어가 진범일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 정황은 더 있었다. 아일랜드의 혈액이 묻은 티셔츠 사이즈가 작은 키의 라우로 주니어 체격과 딱 맞았다. 또 라우로 주니어에게는 필리핀계 조부모가 3명 있었는데, 아일랜드 시신에서 채취한 DNA의 80%는 필리핀계로 추정됐다. 증거에 비춰 매우 유력한 용의자가 사건 발생 33년 만에 포착된 셈이다.

FBI 수사관들은 7월 1일 HPD와의 공조하에 라우로 주니어의 DNA를 비밀리에 수집했다. 식당 매장에서 그가 썼던 포크를 통해서였다. 여기서 얻은 DNA는 '아일랜드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DNA와 일치한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같은 달 19일, 경찰은 라우로 주니어를 소환해 그의 뺨에서 DNA 샘플을 '공식적으로' 채취한 뒤 이튿날 "라우로 주니어의 뺨과 포크, (아일랜드 피살) 범죄 현장 등 3곳에서 각각 수집된 DNA가 모두 동일하다"고 발표했다.

라우로 주니어는 나흘 뒤인 7월 23일 자살했다. 33년 전 범행이 들통난 데 대한 부담감 탓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사법적 단죄는 이제 불가능해졌다. 하와이 이노센스프로젝트는 "경찰이 라우로 주니어를 즉시 체포해야 했다"며 "이제라도 그의 범행에 대한 새 증거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HPD는 "라우로 주니어를 성폭행 혐의로 체포할 수 있는 공소시효가 지났고, 아일랜드 사건은 아직 수사 중이어서 지금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와이주 대법원은 오는 12일 증거 공개에 대한 구두 변론을 진행하기로 했다.

손성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