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재 한 사립대에서 인문학 전공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모(28)씨가 설움을 쏟아냈다. 자기 전공에 대한 애정 때문에 대학원까지 진학했지만, △학교·정부의 무관심 △연구에 전념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요즘 힘들다. 이공계 박사과정은 공부를 하며 월급까지 받는 경우도 있다지만, 김씨가 일주일에 10시간 이상 6개월 연구조교로 근무해 손에 쥐는 돈은 합계 50만 원 정도다. 시급 환산 2,000원, 올해 최저임금(9,860원)의 5분의 1이다.
돈만 적게 받느냐. 그것도 아니다. 외부에선 명문대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교내 연구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김씨가 쓰는 연구실은 약 7평인데, 이 공간을 10명이 공유한다. 한 번에 모든 인원이 들어갈 수 없어 순번을 정한다. 같은 대학 경영학과는 한 명당 하나의 연구실이 주어진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이 정도의 쥐꼬리 인프라마저, 앞으로는 아예 사라질지 모른다는 점. 학교마다 자율전공(무전공) 신입생을 크게 늘리고 있어, 김씨가 몸담은 인문학 쪽은 규모가 더 쪼그라들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는 "당장 가치를 증명하진 못해도 인간의 근본이 되는 학문"이라며 "관심과 지원이 조금이라도 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수시 원서 접수 기간을 앞두고 각 대학이 발표한 정원을 살펴보면, 전공 구분 없이 신입생을 선발하는 '무전공·자율전공학부' 몫이 크게 늘었다. 학생들이 다양한 전공을 경험해보고 적성에 따라 선택하도록 한다는 교육부 기조에 따른 결과다. 그러나 결국 자율전공 확대는 소수 인기학과로의 쏠림 현상과 직결된다. 인문대와 자연대 소속 교수와 학생들은 이런 자율전공 확대가 순수학문 소외를 더 부채질할 것이라는 걱정을 숨기지 못한다.
교육부가 1월 발표한 대학혁신지원사업 개편안에 따르면, 2025학년도부터 수도권 사립대, 국립대는 전체 정원의 20% 이상을 무전공으로 뽑아야 추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학들은 학과별 모집 인원을 줄여 자율전공학부에 배정했다. 8일 교육부에 따르면 자율전공 모집인원은 2024학년도 9,924명에서 2025학년도엔 3만7,935명으로 네 배나 늘어난다.
자율전공 학생은 2학년 때 원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다. 학생 입장에선 공학·상경계열이나 생명과학 등 취업에 유리한 학과를 선택하니, 순수학문 인기는 갈수록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인문학 위기는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지만 자연계열 순수학문 쪽에도 위기감이 감돈다. 대학교육연구소가 2003년과 2022년 대학 정원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수학·물리·천문·지리 관련 학과 정원은 19년 만에 49.4% 줄었다. '문송'(문과라서 죄송하다는 뜻)의 대명사인 어문 관련 학과의 감소율(36.1%)을 훨씬 넘어섰다.
정원 문제는 구성원 갈등으로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사회과학 영역에서 자율전공제도를 실시한 경희대에선, 전체 자율전공자의 85%가 경영학과에 몰렸다. 덕성여대는 4월 독문과와 불문과의 신입생을 받지 않고 250여 명의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기로 결정해, 사실상 두 학과를 폐지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해당 교수·학생들이 크게 반발하는 중이다.
교수들은 불안감을 호소한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지표가 안 좋은 인문대는 언제나 구조조정 대상이라 교수도 잘 안 뽑는다"며 "자율전공 시행으로 인원수가 가장 많이 빠져나가는 곳도 결국은 인문대"라고 말했다. 정원이 줄고 지원금이 줄자 학생들도 답답하다. 서울의 한 대학원을 졸업한 철학 전공자 김모(29)씨는 "지원자가 매년 줄어 세미나·스터디를 할 인원도 모자랐다'며 "옆 대학까지 가 청강을 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순수학문 보호를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김미정 경북대 중문과 교수(전 인문대학장)는 "인기학과 쏠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 순수학문을 어떤 식으로 살릴지 고민을 먼저 한 다음에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창우 서울대 독문과 교수는 "독립적으로 인원을 선발하는 의대와 같이 순수학문에서도 정원 관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