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생후 3개월 윤석이(가명)를 처음 만났다. 온몸이 노랗고 거무튀튀한데, 황달로 보기엔 증상이 심했다. 바로 조직검사와 유전자검사에 들어갔다. 결과는 '진행성 가족성 간 내 담즙정체증(PFIC, 이하 피픽)'. 희소질환 중에서도 초희소질환이다. 소아청소년과 교수로 일한 지 16년 된 고홍(53)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교수가 10번째로 만난 피픽 환자다.
고 교수는 피픽 신약 '빌베이(성분명 오데빅시바트)'가 아시아 처음으로 한국에서 허가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의정갈등으로 전공의와 동료들이 떠난 병원에서, 후배들 선택을 받지 못하는 소아과를 지켜온 그는 진료만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틈틈이 빌베이를 들여오는 데 매달렸다. "아기들한테 도움만 된다면" 시간 쪼개 일하느라 몸이 힘든 건 둘째 문제였다. 의사들도 잘 모르는 피픽을 학회를 쫓아다니며 알렸고, 개발사인 프랑스 제약기업 입센에 한국 도입을 요청했고,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찾아가 설득했다. 드디어 지난달 23일, 허가가 났다.
약은 곧 들어올 텐데, 소아청소년과에는 후학이 없다. 고 교수는 "후배들에게 피픽 치료법을 가르칠 기회가 끊어졌다. 아이들을 살리는 게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아는 의사들이 사라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피픽은 유전자 변이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간에서 담즙이 잘 이동하지 못해 생기는 병이다. 간경변, 간경화, 간암까지 가기 전부터 아이는 이미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계속 온몸이 가려워 잠을 못 자고, 그러니 제대로 자라질 못한다. 국내에 보고된 환자는 100명도 채 안 된다(공식 유병률 10만 명당 1명). 미국과 유럽에선 3년 전부터 쓰인 빌베이가 국내에도 들어오길 부모들은 학수고대했다.
그런데 윤석이는 약이 들어와도 처방을 못 받을 가능성이 높다. 빌베이를 빨리 허가하기 위해 보건당국은 처방 대상을 유럽처럼 모든 피픽 증상이 아닌 가려움증으로 한정했다. 문제는 환자가 너무 어리면 아직 소근육 발달이 안 돼 가려워한다는 걸 의학적으로 '증명'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손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야 가려운 부위를 긁을 텐데, 신생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고 교수는 설명했다. 결국 윤석이를 살리려면 빌베이 허가 전과 마찬가지로 간 이식밖에 방법이 없다. 고 교수는 피픽 환자의 절반가량에는 윤석이처럼 빌베이가 '희망고문'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달력을 보니 윤석이 수술은 아무리 일정을 당겨도 3개월 뒤인 12월에야 가능하다. 소아과도 일손이 없지만, 마취과 전공의가 없는 영향이 더 크다. 이 병원 수술방은 60여 개. 의정갈등 전엔 전공의들이 있었기에 교수 한 명이 수술방 3개씩 돌았는데, 지금은 1개도 허덕인다. 수술이 3분의 1로 줄었으니 계속 밀린다. 간 섬유화가 급속 악화되더라도 수일내 긴급 수술도 쉽지 않다.
수술 전까지 윤석이의 악화를 늦출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 망가진 간의 기능을 돕기 위해 혈액을 몸 밖으로 빼내 정제한 뒤 다시 넣는 간 투석이다. 하지만 신생아에게는 초고난도다. 고 교수가 2010년 처음으로 성공했다. 10여 년 사이 신생아 간 투석에 대한 건강보험 지원이 3회로 제한됐다. 투석 3번 하고 바로 이식이 가능하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말이다. 더구나 지금은 이런 '큰일'을 벌일 의사가 소아과에 거의 남아 있질 않다. 고 교수는 "신생아 간 투석을 앞으로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고 교수가 윤석이보다 먼저 만났던 서연이(가명)는 지난해 말 돌을 갓 지나 어머니의 간을 이식받았다. 두 돌 된 지금도 서연이는 한 살 아래 동생 또래 정도밖에 자라지 못했다. 피픽의 영향도 있지만, 수술 후 복용해야 하는 면역억제제 때문에 성장이 느리다. 빌베이가 조금이라도 더 일찍 들어왔으면 어땠을까. 서연이 어머니는 한국일보에 "약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면, 당연히 아이를 좀 더 키워서 이식 수술을 했을 것"이라며 속상해했다. "아이를 치료하고 살리는 일에 허가 기준, 보험 조건 같은 잣대를 대지 않길 바란다"고 고 교수는 힘줘 말했다.
의정갈등 이후 병원 돌아가는 상황에 고 교수는 노심초사하고 있다. "어른들 힘겨루기에 자칫 애꿎은 아이들이 희생될까 봐서"다. 어린 아기들은 많이 아프면 생명이 위험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병상이 없으면 복도에서라도 치료할 테니 환자 당장 데려오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수술이 밀려 쌓이고, 인력은 점점 더 줄면서 지금은 "살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고 하소연했다.
소아과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지만, "세상 무너져도 아이가 좋다며 소아과로 오겠다는 전공의가 그래도 해마다 한두 명은 있었는데, 의정갈등 이후 다 돌아섰다"고 고 교수는 전했다. 지난 연말만 해도 전공의 8명이 버텨줬다. 하지만 "그들 모두 병원이 다시 정상화하더라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소아과 명맥을 그나마 유지하던 우리 병원도 멸문지화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고 교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의료현장 위기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대통령실, 정부 관계자들의 잇따른 발언에 실망이 컸다"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고 교수 연구실 책상 밑에는 속옷과 양말 1, 2주 치가 쌓여 있다. 올 초 전공의가 떠난 이후 반년 동안 집에 들어간 날이 손에 꼽힌다. 2년 전 연구실에 들인 5만 원짜리 소파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소파에서 몇 시간 쪽잠 자고 새벽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간호사만 있는 소아 병동을 혼자 회진하는 일상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고 교수는 매일 스스로에게 답 없는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