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강에 샹송이 흐르는 예술과 낭만의 도시 파리. 하지만 파리는 1789년 왕의 목을 기요틴으로 베 온 시가지가 핏빛으로 물든 근대시민혁명의 발원지이다. 혁명의 구호인 '자유·평등·박애'는 현행 프랑스헌법 제2조에서 국시(devise)로 살아 숨 쉰다. 그 혁명정신은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성평등으로 재현되었다. 파리 올림픽은 시대정신(Esprit du temps)의 발현이다. 올림픽의 피날레는 여성 마라톤으로 장식되었다. 패럴림픽은 역경을 뛰어넘은 박애와 연대의 발로다. 시상대의 갤럭시 셀카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정과 사랑의 기록이다.
한국 선수단의 활약은 역동적이고 감동적이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스포츠는 생존을 위한 '헝그리'(hungry) 정신의 발로였다. 그 시절 최고의 등용문인 고시 합격도 또 다른 유형의 헝그리 스포츠였다. 하지만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꼰대식 '나 때는 말이야'는 통하지 않는다. MZ세대에게 스포츠는 자아실현이다. 그들의 투혼에서 미래한국의 청사진을 본다. 그래도 아쉬움은 여진으로 남는다. 삐약이 신유빈은 왜 고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나. 상처 난 안세영의 몸과 마음은 아직도 치유 중이다. 고생한 선수들에게 며칠만이라도 더 파리에서 젊은 날 추억의 창을 열어 줄 수는 없었던가. 반면에 10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여자 양궁은 배려와 헌신에 힘입은 스포츠과학의 승리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데 어른들의 행태는 볼썽사납기 그지없다. 체육회는 선수들의 피땀 어린 금의환향 행사를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협회 규약은 시대착오적 명령과 복종을 강요한다. 올림픽 성과를 해병대 극기 훈련으로 자화자찬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 잡은 빛바랜 권위적 잔재들은 청산되어야 한다.
기적적으로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권위주의와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권위주의 시대를 마감한 1987년 민주헌정체제 이후의 정치 지도자들도 예외 없이 가족과 가신의 부정부패로 수신제가(修身齊家)에 실패했다. 한국 특유의 기업집단인 재벌은 세계 경영학계에서 한글 발음 'Chaebul'로 표기되는 학술용어다. 재벌은 산업화를 선도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정경유착과 친족 간 재산 분쟁 및 가족 송사로 도덕성에 치명적 상처를 남긴다.
각계 지도자의 실패는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인지부조화로부터 비롯된다. 세상은 이미 언어에서부터 특권을 거부한다. '대통령 각하'는 대통령님에서 아예 님조차 사라졌다. 영부인은 여사에서 이제 그냥 대통령 부인이다. 정당에서도 권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총재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정재계 지도자들은 친위세력의 옹위 속에 여전히 권위의 탈을 벗어나지 못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윗사람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내 탓이요"라고 했듯이 남 탓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 헐벗고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 풍요를 만끽하는 경제시민은 이제 공화국의 민주시민으로서 소양과 품격을 가져야 한다. 공동선(common goods)에 입각한 선한 시민들의 공동체를 형성할 때 진정한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이 구현된다.
이제 경제시민·민주시민에서 더 나아가 세계시민의 길을 열어야 한다. 신유빈의 언니들 이지혜·전지희는 중국 귀화인이다. 쇼트트랙 임효준은 중국으로 귀화했다. 배드민턴 여제에 대한 귀화 유혹도 현실이다. 올림픽 주최국인 프랑스 선수 대부분이 귀화한 아프리카 흑인들이다. 다민족국가로 진입한 대한민국도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에 입각하여 폐쇄적인 종족적 민족주의를 벗어나 보편적인 시민적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