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게 좋아요. '황태자'나 '황제'라고 부르면 그런 거 하지 말라고 그래. 가수가 무슨 황제 출신이고 왕 가문이냐고. 나는 그냥 '영원한 오빠' '오빠의 원조' 이걸로 끝이야. 나이 여든에 오빠라니 얼마나 좋아. 굉장히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죠.”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가수 남진(79)은 이달 4일 개봉하는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 ‘오빠, 남진’의 제목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오빠, 남진’은 1970년대 나훈아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가요계 톱스타로 군림하던 ‘영원한 오빠’ 남진의 음악 인생을 다룬다.
남진은 가수 겸 배우로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정작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는 처음이다. 그는 “아직 마음은 젊은데 다큐멘터리를 만들 정도까지 왔나 했는데, 1964년에 시작한 가수 인생이 60년 지났으니 그럴 때도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남진은 트로트 가수로 알려져 있지만 데뷔 초엔 미국 팝의 영향을 받은 창법으로 인기를 끌었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별명도 그 때문이다. 트로트로 인기를 얻은 건 터무니없는 이유로 금지곡을 양산하던 박정희 정부의 문화 정책 때문이었다. “(2집 앨범 타이틀 곡) ‘연애 0번지’를 발표한 지 6개월쯤 되니 반응이 오기 시작했는데 (퇴폐적인 노래라고) 금지가 됐어요. 지금 그런 얘기 하면 미친놈이라 그러겠지만, 그땐 그랬어요. 그 바람에 ‘울려고 내가 왔나’를 불러 대박이 난 거예요. 하라니까 불렀지 처음엔 트로트를 싫어했는데, 그 노래가 가수 남진을 만들어줬어요. 거기서 인생과 세상을 배웠지요.”
‘님과 함께’ ‘가슴 아프게’ ‘빈 잔’ 등 숱한 히트곡을 남기는 사이 남진의 음악 인생도 격랑의 세월을 거쳤다. 인기가 한창이던 1968년 베트남전쟁에 파병돼 죽을 위기를 겪었고, 몇 년간의 미국 이민 생활 후 1982년 귀국해선 알 수 없는 이유로 방송 출연이 금지돼 가수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고향인 전남 목표로 돌아가 유흥업소를 운영하던 1989년 조직폭력배가 휘두른 흉기에 맞아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남진은 베트남에서 1년간 의무 복무 기간을 채운 뒤 자원해서 1년 더 복무하기로 결심했던 자신에게 고맙다고 했다. “지금 같으면 절대 연장 안 하지. 하지만 내 직업을, 인기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거야. 스타가 되기 위해선 그걸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 (내가) 그 생각을 하게 해준 게 고마워요.”
한국 대중음악사의 산 증인인 남진은 지난해까지 신곡을 발표하는 등 최고참 현역 가수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나훈아의 결정에 “아직도 노래가 잘 되는데 은퇴는 조금 빠르지 않나 싶다”며 아쉬움을 밝힌 그는 “나는 ‘노래가 안 되니까 은퇴한다’는 말을 듣기 전에, 노래가 될 때까지 하고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