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부나 낮은 금리를 희망한다.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경제학원론을 굳이 펼쳐 보지 않아도 금리가 낮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알 것이다. 가계든 기업이든 낮은 금리로 돈을 열심히 빌려 소비를 하든 투자를 하든 한다. 부채 위에 위태롭게 쌓인 것이라고는 해도 경기를 부양하는 데 그만한 정책이 없다. 돈(재정) 한 푼 쓰지 않고 경기를 띄우는 것이니 정부 입장에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일 것이다.
정부엔 정부 역할이 있듯, 중앙은행엔 중앙은행 역할이 있다. 한국은행법 제3조는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은 중립적으로 수립되고 자율적으로 집행되도록 해야 하며, 한국은행의 자주성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중립적, 자율적, 자주성 등 동어반복적인 표현을 이렇게 많이 쓴 이유는 분명할 것이다. 정부의 저금리 본성에 누군가 독립적으로 제동을 걸지 않으면, 경제는 과열로 폭발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 중앙은행을 ‘파티 브레이커(party breaker)’라 칭하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와 중앙은행 간 힘의 불균형은 현격하다. 한은이 정부의 ‘남대문출장소’라 불리던 치욕적인 시절까지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한은은 늘 정부 압박에 시달려왔다. 독립기관이라지만 총재는 물론 금융통화위원 임명권도 대통령에게 있다. 혈혈단신으로 골리앗 같은 정부와 맞닥뜨려야 하는 다윗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만의 얘기도 아니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금리 인하를 공개 압박했다. 심지어 제롬 파월 의장의 해고를 검토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번에도 대통령이 되면 통화정책에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취지의 발언까지 대놓고 한다. 그래도 꿋꿋이 버티는 건 오랜 기간 축적된 연준의 역량일 것이다.
대통령실의 22일 금리 발언은 이런 사정을 다 감안하더라도 영 황당하다. 이날 한은이 기준금리를 동결한 걸 두고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내수진작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금리 인하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건 장삼이사도 예상한 일이었다. 미국은 일찌감치 금리 인하 시기를 저울질해왔다. 미국과의 금리 동조화가 불가피한 현실에서 조금 빠르냐 늦냐의 차이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은이 마음 놓고 금리를 내릴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건 정부의 몫이어야 했다. 폭탄을 잔뜩 깔아놓고 금리를 내리지 않아 아쉬웠다니, 그게 대통령실이 할 소리인가. 깔아놓은 폭탄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디딤돌대출, 신생아특례대출 같은 저금리 정책대출을 마구 퍼부어줬고, 대출 한도를 조이는 규제를 딱히 설득력 없는 이유로 늦췄다. 대출이 폭증해 집값이 뛰니 은행들에 대출금리를 높이라 압박해놓고, 막상 효과가 없으니 언제 금리를 올리라 했느냐고 책임 회피까지 한다. 이번에 꺼내 든 건 은행별 총량규제다. 금리는 꼬일 대로 꼬이고, 대출절벽으로 실수요자까지 피해를 입을 판이고, 집값은 잡지 못하는 총체적 난국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가 대통령실을 향해 이렇게 직격탄을 날렸다. “왜 우리가 지금 금리 인하를 망설여야 할 만큼 높은 가계부채와 수도권 부동산 가격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빠지게 됐는지에 대한 성찰은 부족해 보인다.” 사방에 깔린 폭탄을 두고 금리를 내리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이대로면 10월도, 11월도 금리를 내리지 않는 게 옳다. 대통령실이 지금 고민해야 할 건 눈앞의 내수진작이 아니라 폭탄 제거도 없이 찾아올 금리 인하 후폭풍에 대한 사전 대비다. 이런 주문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정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