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진하고 행진한다, (…) 맞다, 우리는 빵을 얻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우리는 장미도 얻기 위해 싸운다.' 미국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이 1911년 발표한 시 '빵과 장미'의 한 구절이다. 빵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장미는 인간답게 살 권리를 뜻한다.
이듬해 1월 매사추세츠주(州) 로렌스. 거리 위의 굶주린 여성 노동자들은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고 외쳤다. 20세기 초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 훗날 '빵과 장미의 파업'으로 불리게 된 연유다.
'빵과 장미'라는 익숙한 은유는 '로렌스 파업'에 나선 노동자 1만4,000여 명의 투쟁에 대해 말해주는 게 거의 없다. 이후 미국 사회를 휩쓴 매카시즘의 '빨갱이 사냥'은 노동자들의 기적 같은 승리를 묻어버렸다. 로렌스의 초등학교에서 일한 적 있는 저널리스트 브루스 왓슨은 잊힌 '로렌스 파업'을 멋지게 복원해낸다. "오늘도 하루 1달러로 살아가는 전 세계 수십억 민중을 위해" 쓴 책 '빵과 장미'를 통해서다.
책은 섬유 산업 중심지였던 로렌스의 황량한 뒷골목과 썩어가는 빈민가 좁은 골목에서 '노동'의 모습을 포착한다. 당시 로렌스는 스코틀랜드, 아르메니아, 포르투갈,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등 51개 나라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찾아온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용광로'였다. 주로 섬유 공장에서 일하던 이들은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 6~8명이 몸을 구겨 넣고 살았다. 침대 하나에 4명이 자기도 했다. 공장주들은 이들을 경주마처럼 몰아댔다. 베틀이 돌아가는 동안 사흘에 이틀꼴로 인명 사고가 났다. 공장 관리자의 평균 수명이 58세인 반면 노동자는 39세에 불과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기 불꽃처럼" 시작됐다. 단돈 24센트, 빵 세 덩이를 살 수 있는 돈 때문이었다. 주(州) 정부가 노동 시간을 주 56시간에서 54시간으로 줄이면서 임금 24센트가 깎였고, 노동 시간이 줄어도 임금은 깎지 않겠다던 약속을 공장주들은 지킬 리 없었다. 작업을 거부한 폴란드 여성 노동자 200명에 동조한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세계산업노동자연합(IWW)의 지원 사격까지 받은 파업은 두 달 넘게 이어졌다. 미국 최고 부자 중 하나였던 '섬유업계 제왕' 윌리엄 매디슨 우드는 두 손을 들었다. 조직되지 않고, 서로 말도 통하지 않던 노동자들이 자본과 공권력, 언론에 맞서 승리한 것이다. "로렌스 파업 덕에 임금 인상 혜택을 본 노동자가 30만 명에 달했으며, 그해 섬유 노동자들 주머니에 1,200만 달러가 더 들어갔다."
파업은 112년 전 로렌스라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옮긴이 해제에서 "(로렌스 파업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과 고통과 절망과 싸움이 생생히 드러나 있기에 '영원한 현재'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모두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