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문경호 "내 돈 들여서라도 조선환여승람 한글본 펴내고 싶다"

입력
2024.09.2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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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인문지리지 번역 안 돼 '수장고 신세'
철도·교량 등 일제 때 산업과 사회 상황 담아...

"사비를 들여서라도 한글로 번역해서 세상에 내보이고 싶습니다. 소중한 자료가 묻혀 있다는 점에서 역사학자로서 죄책감이 듭니다."

문경호(51)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조선환여승람'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한글 번역 작업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조선환여승람은 충남 공주 출신 유학자 이병연(1894~1977)이 전국 229개 군 중 129개 군을 직접 돌며 정보를 수집해 목판본으로 간행한 국내 최대 인문지리지다. 이병연은 1910년부터 1937년까지 27년간 100여 명을 동원해 각지 풍속과 인물, 인구, 교량, 특산물 등 49개 항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역사학계는 원본 목판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국역본이 없는 점은 두고두고 아쉬울 수밖에 없다.

문 교수가 조선환여승람을 처음 접한 것은 '고려시대 조운제도'를 연구하던 대학원 시절이다. 문 교수는 "안흥량(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배 사고가 잦아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세조까지 그 지역에 운하 건설을 시도했는데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면서 "하지만 조선환여승람에 그 터가 태안과 서산 사이 '굴포'라는 지역이라는 기록이 나와 있어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굴포는 현재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로 공주대에서 서산시와 태안군에 사적 지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조선환여승람 덕택에 아파트 건설로 파헤쳐 없어질 유적을 발견하고 사적지로 보존한 사례도 있다. 문 교수는 "2008년쯤 현재 대전 유성구 상대동에 아파트를 짓기 위한 지적 조사 중 조선환여승람에 기록된 유성현 관아 터를 발굴했다"며 "청자·백자와 함께 관아 건물터 등 소중한 유산이 쏟아져 나와 당초 설계에 있었던 아파트 한 동을 뺀 채로 아파트가 세워졌다"고 설명했다.

문 교수의 관심사는 조선환여승람의 국역이다. 전체 분량의 국역과 출판까지는 약 80억 원의 비용이 든다. 충남도 15개 시군의 분량 국역만 해도 12억 원 정도가 필요하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도움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문 교수의 진단이다. 다행스럽게도 공주 지역 역사학계의 국역 요청에 대해 최근 충남도 측은 충남도 시군 분량 국역에 대해서는 긍정적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연이 수집한 129개 군 중 26개 군의 내용만 책으로 제본됐으며, 나머지 103개 군은 일제의 방해와 재정난,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책으로 편찬되지 못했다. 조선환여승람이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잘 알기에 문 교수는 "사비를 털어서라도 국역본을 편찬하고 싶다"고 강조한다.

이병연은 1929년 조선환여승람 서문에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육성하는 데 지리와 역사학을 널리 섭렵하는 것이 지름길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소식을 전하는 것이 이 책 말고 무엇이 있을까?"라고 적었다.

문 교수는 "저자 이병연은 나라를 빼앗겼지만, 책을 통해서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목적의식을 갖고 조선환여승람을 편찬한 것"이라며 "조선환여승람의 한글 번역이 이뤄진다면, 이는 단순히 문서를 번역하는 것을 넘어 우리 역사와 문화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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