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소재 사업을 하던 오스코텍은 2008년 미국 보스턴에 바이오 벤처 제노스코를 설립했다. LG생명과학 신약연구소장 출신 고종성 박사를 중심으로 신약 개발에 뛰어들었다. 제노스코가 개발한 폐암 치료물질은 16년 뒤, 유한양행과 글로벌 제약사 얀센을 통해 미국에서 허가를 받은 첫 국산 항암제 '렉라자'가 됐다. 7조 원에 가까운 연매출이 기대되는 가운데, 오스코텍과 제노스코는 로열티(기술료)로 연간 1,000억 원 이상씩 받을 전망이다. 1세대 바이오 벤처 등장 이래 처음으로 벤처-국내 제약사-글로벌 빅파마로 이어지는 신약 개발 시나리오가 완주에 성공했다.
업계에서는 렉라자 사례를 발판 삼아 국내 바이오 벤처의 연구개발(R&D)과 비즈니스 전략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선례는 더 발전시키고 유사 사례를 계속 만들어내기 위해 지원책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1세대 바이오 벤처의 과오와 정부 주도의 벤처 육성 환경에서 벗어나 성숙한 시장으로 도약하기 위한 경쟁 체제를 준비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렉라자와 같은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방식의 신약 개발이 활성화하려면 후보물질과 의료 기술 등의 지식재산권(IP)이 모이고 거래가 이뤄질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벤처·스타트업의 IP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곤 있지만, 업계에선 전문적 특성을 고려한 바이오 집중 플랫폼을 원한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2020년 문을 연 '바이오 아고라'가 있었지만, 지난해 말 전면 재개편을 이유로 운영이 중단됐다.
다행히 민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가 2022년 12월 자체 온라인 기술거래 플랫폼을 연 것이다. 현재까지 2,100여개 후보물질과 국내외 회원사 약 240개를 확보했다. 이를 기반으로 오프라인에서도 바이오 벤처와 제약기업이 기술 교류를 하는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경호 제약바이오협회 산업진흥팀장은 "미국에선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을 대형 엑셀러레이터(벤처육성기업)나 정보기업이 유료로 운영하거나, 글로벌 빅파마가 막대한 자금으로 자체 운영한다"고 전했다.
그간 정부가 주도했던 초기 신약 후보물질 발굴 지원 정책, 벤처펀드의 규모와 효율성을 모두 키워야 할 시점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벤처들이 임상시험 3상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수조원 단위의 이른바 메가펀드를 만들자는 의견도 일부 있지만, 국내 산업 규모에선 제2, 3의 렉라자 사례를 축적하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김석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임상 1·2상 단계에서 기술수출해 상용화까지 달성한 경험을 더 누적시키며 성공 확률을 높여야 할 때"라며 "아직 국내 기업들은 위험과 비용 부담이 큰 3상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창업 초반을 지나 기업공개(IPO) 수준의 바이오 벤처 생태계에는 정부 개입이 축소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일례로 기술특례상장 제도는 최근 홍콩 증시에서 벤치마킹할 만큼 벤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비즈니스 모델이 부재한 일부 1세대 벤처들이 국내 증시에 쉽게 입성하고 쉽게 '연명'하며 시장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게 만든 책임도 크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1세대 창업 실패 후 재창업에 성공한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는 "이미 세계 시장에서 실패한 바이오 기업이 한국 증시에서 연명하며 악순환을 만들어왔다"면서 "벤처인들도 정직하게 책임을 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변화 조짐은 보인다. 바이오 벤처 창업 후 IPO까지 걸리는 기간이 2013년엔 8.3년이었는데 2020년엔 10.7년으로 늘었다. 증시 진입이 까다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거래소나 식품의약품안전처 같은 공공기관은 바이오 산업의 고도화 속도를 따라잡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시장경제에 자율성 보장을 확대해 혁신으로 연결시켜야 하는 이유다. 기술 가치와 임상시험 성과에 따라 상장과 시장 퇴출이 자유로운 미국처럼 말이다. 김석관 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 정부는 시장 개입을 줄이고, 기업의 투명한 정보 제공을 감시하는 엄격한 지침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기업 스스로도 선진 경영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일부 바이오 기업이 시작한 사외이사 중심 이사회 제도가 좋은 예다. 경영 지식이 없던 1세대 바이오 벤처가 벤처캐피탈(VC)을 만나면서 최고기술책임자와 최고경영자가 분리되긴 했으나, 여전히 기술 중심의 창업자에게 힘이 쏠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정규 브릿지바이오 대표는 "일본, 유럽과 비교해 한국 바이오 산업은 충분히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며 "정부, 공공기관, 투자자, 증권사, 미디어가 동참해 시장 성숙을 위한 아이디어를 모아야 할 시점"이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