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현지시간) 금요일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州) 주도인 뮌헨에서 펼쳐진 '불금' 풍경이다. 열기가 뜨거웠던 이곳은 뮌헨에서도 유동인구가 많은 중앙역 인근 '구식물원 공원' 입구에 들어선 비어가르텐(Biergarten) '디 눌'(Die Null). 직역하면 '맥주 정원'인 비어가르텐은 독일에서 '야외 술집' 정도로 해석되는데, 날씨가 좋은 봄에서 가을까지 한시적으로 열었다가 닫는 경우가 많다. 디 눌도 지난 7월 말부터 2개월간 운영되고 있었다.
겉보기에 여느 비어가르텐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디 눌은 사실 '180도 다른' 장르다. 알코올이 주가 되는 다른 비어가르텐과 달리 알코올이 섞인 음료를 전혀 팔지 않기 때문이다. 메뉴에는 목테일(Mocktail·무알코올 칵테일), 무알코올 맥주와 와인, 각종 탄산 음료와 과일주스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고, '술을 원한다면 다른 장소를 찾아라'와 같은 안내가 곳곳에 나붙었다. 상호가 독일어로 '0'을 뜻하는 '눌'인 것도 '알코올 농도 0%'라는 뜻이다.
세계 3대 축제인 '옥토버페스트'(9월 중순~10월 초 열리는 맥주 축제)가 열리는, '세계의 맥주 수도' 뮌헨에 '무알코올 비어가르텐'이 생긴 건 처음이다. 독일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인지 뮌헨 현지에서 살펴봤다.
디 눌은 뮌헨역 인근에서 '코스모스'라는 바 겸 카페를 운영하는 플로리안 쇤호퍼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했다. 그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2년 전쯤 문득 무알코올 맥주 등 알코올을 대체하는 음료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무알코올 비어가르텐 착안 계기를 설명했다. "알코올 대체 음료 수요가 10배는 늘었더라고요. '어라? 전문점을 차릴 만한데?'라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어요. '유흥'이라고 하면 흔히 클럽에서 술 마시기 등을 떠올리는 게 일반적인 상황에서 술 없이도 놀기 좋은 장소가 생긴다면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새로운 사업을 위해선 자금이 필요했지만 투자 받기가 쉽지는 않았다. "기존 비어가르텐에서 무알코올 음료를 판매하고 있는데 굳이 무알코올 음료만을 파는 가게를 따로 차릴 필요가 있느냐", "뮌헨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등 회의적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디 눌과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한 바의 운영자도 익명을 전제로 한국일보에 "술을 안 마시는 이들에게는 카페라는 대안이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사실 쇤호퍼 생각에도 일반 비어가르텐에 비해 사업성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한자리에서 맥주 1리터를 마시는 사람은 있어도 레모네이드 1리터를 마시는 이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 눌이 들어선 구식물원 공원에 위치한 '찰스 호텔'과 비어가르텐 '파크 카페'가 협력에 나서고, 뮌헨시가 부지 허가를 신속하게 내주는 등 강력하게 지원하면서 디 눌은 지난 7월 문을 열 수 있었다. 독일 빌트에 따르면 영업 첫날 디터 라이터 뮌헨 시장도 이곳을 찾아 '뮌헨 최초 무알코올 비어가르텐'의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회의적 전망과 달리 디 눌은 순항했다. 디 눌 운영을 총괄하는 막시밀리안 블린트후버에 따르면 80개 정도의 좌석을 갖춘 이곳을 하루 수백 명이 방문했다. 무엇보다 반응이 좋았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는 손님들이 많다"고 말했다. "건강, 알코올 중독 등 문제로 술을 피하고 싶은 이들, 어린이 또는 노약자와 동반해 취객을 되도록 멀리하고 싶어하는 이들 등이 이곳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듯 해요. DJ 공연을 즐기고 싶지만 술을 못 마시거나 싫어하는 이들도 만족해하고요. 청소년용 테크노 공연은 특히 호응이 뜨거웠어요."
손님들 반응도 비슷했다. 오스트리아에서 놀러 온 친구와 이곳을 찾았다는 주민 엘라는 "'무알코올 비어가르텐'이라는 정보 없이 노래가 들리길래 방문했는데 평소에 술을 즐기지 않는 터라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독일인 소냐는 "독일의 많은 장소가 술과 연관돼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알코올을 아예 없앴다는 건 엄청난 시도"라고 말했다. "술집에서 술을 시키지 않을 때는 '정식 손님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아도 돼서 좋다"는 손님도 있었다. 손님 중에는 어린 자녀를 안고 무알코올 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즐기는 아빠도 보였다.
디 눌이 순항한 건 단순히 '운이 좋아서' 또는 '목이 좋아서'가 아니다. "알코올 대체 음료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는 쇤호퍼 말처럼 디 눌은 사실 알코올 소비가 줄고 있는 독일 사회의 '큰 흐름'을 탔다.
독일 통계 플랫폼 스타티스타에 따르면 2012년 137.8리터였던 독일 국민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은 10년 뒤인 2022년 120.1리터로 떨어졌다. 10년 사이 12.8%(17.7리터)가 감소한 것이다. 독일 대표 주종인 맥주 시장에서 무알코올 맥주 비중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도 알코올 소비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방증이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2억4,000만 리터였던 무알코올 맥주 양조량은 2022년 4억7,400만 리터로 두 배가량 늘었다.
독일이 술을 덜 마시게 된 이유는 뭘까. 니나 괼링어 독일양조협회 대변인은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①고령화 ②건강 염려 증가 ③음료 시장의 다양성 확대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봐요." 세계보건기구(WHO)도 지난 4월 "어떤 수준의 알코올 소비도 우리 건강에 안전하지 않다"는 '솔직한 선언'을 하는 등 술에 대해 더 높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다.
괼링어 대변인은 이렇게도 덧붙였다. "④젊은 세대에서 '술을 책임감 있게 소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 태어난 세대에서는 이전 세대보다 술을 안 마시거나 덜 마시려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의식적으로 술 소비를 제한하는 의식 및 태도를 일컬어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를 지향한다는 뜻)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다.
이러한 분위기를 이어가려는 듯 독일 정치권도 음주 관련 기준을 강화하고자 팔을 걷어붙였다. 알코올 섭취량이 줄고 있다고는 해도 독일이 여전히 유럽에서 최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인 것은 알코올 판매·구매 제도가 너무 느슨한 것과 관계가 크니 관련 제도를 정비하자는 것이다. 독일 연방 보건부가 최근 '14~16세 청소년이 보호자와 동반할 경우 맥주, 와인 등을 마셔도 된다'는 내용의 법을 폐지하겠다고 밝힌 게 대표적이다.
실제로 독일은 술에 관한 한 제한이 가장 적은 국가로 분류된다. 유럽 상당수 국가에서 술 판매권을 국가가 독점하거나, 특정 시간 또는 장소 외 알코올 판매를 제한하는 것과 달리 독일에서는 언제든 슈퍼마켓에서 알코올을 살 수 있다. 1유로(약 1,500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맥주 1병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술값도 싸다. 도수가 높지 않은 축에 속하는 와인과 맥주를 구입할 수 있는 연령은 16세에 불과하다. 길거리에서는 물론 열차, 버스 등에서의 음주도 비일비재하다.
알코올 수요가 줄고 음주 관련 기준이 강화되더라도 알코올을 사랑해 온 오랜 독일의 역사를 고려할 때 디 눌은 한동안 '예외적 장소'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뮌헨에 거주하는 리암은 "디 눌이 반짝 주목을 받더라도 아침 식사를 맥주로 대신할 정도로 술을 사랑하는 독일 문화를 바꾸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23일 오후 8시 기준 디 눌에는 10팀 정도가 있었으나 바로 옆 파크 카페 손님 규모는 어림잡아 4배는 됐던 것도 무알코올 비어가르텐이 '대세'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힘을 보탠다. 디 눌에 입장하려다 술을 팔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발길을 돌린 이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 눌은 술을 사랑하는 독일에 '균열'이 생겼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상당하다. 현지 언론 100곳 가까이가 디 눌을 앞다퉈 취재한 이유일 터다. 디 눌의 손님을 지켜보던 블린트후버는 말했다. "'사회를 바꾸겠다'거나 '바꿀 수 있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쉽지도 않을 거고요. 그래도 '어쩌면 술은 생각보다 덜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데는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