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안 받아줘서 전화 뺑뺑이"…응급실 위기 진짜 원인은 '배후 진료' 붕괴

입력
2024.08.2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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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환자 인계하는 진료과도 피로 누적
후속 진료 어려워 응급실서 환자 수용 거부
외래 비중 줄여야 중증·응급진료 역량 회복
경증환자 분산… 응급의료체계 대수술 필요


“환자 한 명 이송하기 위해 병원 예닐곱 군데 전화를 돌리는 건 기본이에요. 응급실 뺑뺑이가 아니라 ‘전화 뺑뺑이’ 하느라 나가떨어질 것 같아요. 가까운 대학병원에서 안 받아 줘 서울 강남에서 경기 의정부까지 간 적도 있습니다. 매 순간 피가 마릅니다.”
서울 지역 119구급대원

환자들이 의사를 찾아 거리를 떠돌고 있다. 구급대원은 골든타임을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시도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든다. 응급실 문 앞에서 환자 인계를 거부당해 구급차 운전대를 돌리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됐다. 반 년 넘게 이어지는 의료 공백에 만성적인 인력 부족까지 겹쳐 응급실이 지칠 대로 지친 탓이다. 의료 현장에서는 다음 단계인 배후 진료 차질을 응급실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27일 의료계에 따르면 전공의 이탈 이후 응급실 전문의들은 전공의 몫까지 소화하느라 과부하에 걸렸다. 전공의 교육과 연구를 못하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껴 사직을 고심하는 교수들도 있다. 의사 한 명만 빠져도 남은 의료진의 당직 부담이 급격히 커지기 때문에 연쇄 이탈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응급실 의사 수가 줄어든 건 아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권역응급의료센터 42곳에 재직 중인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의료 공백 이전인 올해 1월 489명에서 6월 498명으로 오히려 약간 늘었다. 최근 파행 운영된 충북대병원, 속초의료원, 세종충남대병원처럼 의사가 없어서 응급실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전체 응급의료체계 인력 구조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라는 얘기다.

의료계는 "응급의료 위기의 진짜 원인은 응급실 너머 배후 진료에 있다"고 지적한다. 통상 환자가 응급실에 오면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초기 진료와 검사를 하고 이후 내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산부인과, 정형외과 등 각 진료과가 내려와 전문 진료를 한다. 상태가 위중하면 해당 진료과가 환자를 인계해 응급 수술, 입원 치료를 맡는다. 응급의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배후 진료가 유기적으로 뒷받침돼야 하는데, 지금 그 연결고리가 삐걱거리고 있다. 배후 진료과도 번아웃됐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수는 "전공의가 나간 뒤 전문의 7명이 돌아가며 당직을 섰는데 체력적 심리적 한계에 부딪혔다"며 "응급실까지 챙길 여력이 없어 얼마 전부터는 응급실로 들어오는 환자는 아예 못 보고 있다"고 토로했다. 수도권 대형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도 "응급실 의사 혼자서 모든 진단과 처치를 할 수는 없다"며 "배후 진료 역량이 떨어지면서 응급실 업무강도가 훨씬 올라갔다"고 말했다.

중앙응급의료센터 종합상황판을 보면 각 병원마다 '정형외과 응급 수술 불가' '안과 환자 응급 진료 가능하나 응급 수술은 불가' '비뇨기과 진료 불가' '내시경 불가' 등 진료 제한 안내 메시지가 공지돼 있다. 대부분 배후 진료에 해당한다. 진료 제한이 있다고 해서 응급실 기능이 위축됐다거나 응급의료가 마비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응급실 운영에 일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응급실 단계부터 환자를 아예 안 받거나 가려서 받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 구급대원 A씨는 "응급실에 전화를 하면 의사나 병상이 없다고 하는데 막상 가 보면 병상이 텅 비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의사가 환자 상태를 살펴보지도 않고 무작정 거부하면 119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토로했다. 경기 지역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배후 진료과에서 수술도 입원도 어렵다고 하면 응급실은 환자를 받아줄 다른 병원을 알아봐야 한다"며 "전원 과정이 쉽지 않을뿐더러 그 전까지 오롯이 환자를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다"고 말했다.

결국 배후 진료 역량이 회복돼야 응급실 환자 진료도, 응급이송체계도 정상화될 수 있다. 조승연 인천의료원장은 "각 진료과 전문의가 중증환자, 응급환자 진료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외래진료 비중을 대폭 줄여 업무 과부하를 낮추고 보상을 강화해야 한다"며 "응급실 전문의가 부족해도 다른 과목 전문의가 포괄적으로 기능을 분담하는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응급의료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응급실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응급실 내원 환자 44%를 차지하는 경증환자를 동네 병의원으로 분산할 필요도 있다. 서울 남부 지역 구급대원 B씨는 "야간에 119를 찾는 수요 중에는 단순 찰과상이나 감기 등 증상이 가벼운 환자가 상당히 많다"며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일차의료 기관을 야간진료에 활용하면 경증환자가 응급실에 몰리는 현상을 다소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장기적으로 응급의료체계를 대폭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도 있다. 임준 인하대병원 예방관리과 교수는 "권역응급의료센터(42개)와 지역응급의료센터(137개)에 인력과 인프라를 집중하고, 규모가 작은 지역응급의료기관(230개) 가운데 제 역할을 못할 정도로 역량이 떨어지는 곳은 응급진료가 아닌 야간진료 등으로 기능을 전환하도록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