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긴 몰라도 군대에 다녀온 대한민국 남성은 모두 자신이 '낀 세대'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침 자기 대(代)에 부대 내 악습과 폐단이 사라지면서 위에서 밟히고 아래에서 치였던 '낀 세대'. 예컨대 ‘내가 이등병을 벗어날 즈음 가혹행위가 근절’되고, ‘상병 아래로는 쓸 수 없었던 세탁기가 내가 상병이 되니 모두가 쓸 수 있게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모두가 존 롤스가 말한 '무지의 장막' 뒤에 서 있다면 이런 부조리는 진작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계급만큼의 시간이 쌓이고 그 시간만큼 보상 심리가 작동한다. "왜 하필 나 때에"라는 억울함.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그 배 아픈 심정은 변화를 가로막는다. 따라서 모든 개혁은 누군가 손해 보고 욕먹을 각오로 사람들의 보상 심리를 끊는 데서 시작한다.
지난 20일 참고인 신분으로 전주지검에 출석한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보면서 7년 전 문재인 정부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압도적인 표차로 대권을 거머쥔 문재인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각자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청와대 경내를 거닐던 모습은 마치 개선문을 통과하는 드골의 군대를 보는 듯했다. 그들은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적폐 청산 수사를 단행했다. 검찰 특수부를 키우고 힘을 실어줬다. 5년 동안 1,000여 명이 소환조사를 받았고 200여 명이 구속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 대통령과 참모들은 이상직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 임명으로 자신들이 수사를 받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정치보복 수사를 여기서 더 하게 된다면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라는 임 전 실장의 발언에 입맛이 씁쓸했다.
반복되는 복수, 그 이면의 보상 심리는 오늘날 한국 정치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적폐 청산 수사로 이어졌고, 그 시절 보수 정당이 겪은 시련은 오늘날 야당을 향한 분노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서로가 "저쪽이 먼저 잘못했다", "너희는 여당 때 어땠느냐"는 말만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협치는 요원하다.
지난 광복절에 열린 정부 주최 경축식, 우원식 국회의장도 불참한 그 자리에 허은아 개혁신당 대표는 야당 대표 중 유일하게 참석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에 더해 신지호 국민의힘 전략기획부총장의 "기쁨조" 발언도 불거지며 "그 자리에 왜 가느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허 대표는 "경축식 행사는 윤석열 정부의 행사가 아닌 대한민국의 행사"라며 "원칙을 지키는 차원에서 참석한다"고 밝혔다. 그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인사를 국민 눈높이에서 하고 국민과 소통하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잘했다"는 여론이 뒤따랐다.
이날 행사에서 허 대표가 내민 손은 윤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을 향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허 대표마저 불참했다면 모든 야당이 정부 행사에 빠지는 나쁜 선례를 남겼을 것이고, 그 사실은 두고두고 핑곗거리로 작용하며 '반쪽짜리 기념식'을 반복하게 했을 것이다. 민생과 협치는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다. 그 실천은 지난날의 분노를 극복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저들이 먼저 그랬다"라는 변명이 아니라 "욕먹더라도 우리가 먼저 손 내밀겠다"라는 대국적인 정치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