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관련 소송에서 연거푸 나온 위자료 액수 '20억 원'에 법조계가 술렁이고 있다. 범죄 사망 피해가 아니고, 이혼 관련 정신적 손해배상인 위자료(재산분할과 별도)는 1억 원 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이번 위자료 판결이 치솟는 물가와 동떨어진 액수로 빈축을 샀던 이혼 위자료 기준을 흔드는 시발점이 될지에 관심이 쏠린다.
25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올해 5월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가사2부(부장 김시철)가 최 회장에게 위자료 20억 원의 지급을 명령하기 이전, 이혼소송 관련 최대 위자료 산정금은 2억 원이다. 이 역시 지난해 10월 같은 재판부에서 내린 판결로, 당시 재판부는 부인이 불륜 남편에게 청구한 5억 원 위자료 중 2억 원을 인용했다. 1심(3,000만 원)보다 인정 액수가 대폭 상향된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노 관장 사건에서 1년 만에 단번에 '10배 기록'이 나온 것을 두고, 법조계에선 '재벌 사건'이라는 특수성이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실제 노 관장이 최 회장 동거인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에게 건 손해배상소송을 심리한 서울가정법원 가사4부(부장 이광우)는 22일 "두 사람의 혼인기간, 혼인이 파탄에 이른 경위, 재산상태, 경제규모 등을 참작했다"며 "부정행위로 인한 재산 유출 등이 배상액 산정에 고려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주목할 점은 위자료는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이란 것이다. 혼인 기간 중 함께 모은 재산을 나누는 재산분할과는 별개다. 주관적 피해를 객관적으로 계산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2017년 법원행정처에서 민사 위자료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는데, 이때 최고액이 9억 원이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처럼 영리를 목적으로 한 불법행위에 특별가중인자와 일반 가중사유까지 더했을 경우였다. 이혼소송에만 국한하면 서울가정법원이 2007년 마련한 이혼 위자료 산정표상 1억 원이 최대 권고 액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20억 원 위자료가 관심을 끄는 건 바로 '형평성' 문제 때문이다. '범죄로 사망한 피해자의 가족이 받는 정신적 고통'보다 '재벌 배우자가 불륜으로 받은 정신적 고통'을 훨씬 높게 취급한 셈이어서다. 서울의 한 현직 판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불륜 상대에게 인정한 손해배상액은 3,000만 원 선이었다"면서 "목숨을 잃은 피해자에 대한 위자료도 1억 원을 넘기 쉽지 않은데 재벌 사건에서만 고액의 위자료를 인정해줄 논리가 탄탄하지 않다"고 짚었다.
반면 이번 소송을 계기로 이혼 위자료 액수를 현실화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금의 위자료 수준은 경제 규모를 반영하지 못하는 데다, 외국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낮다는 국민적 비판에 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도권의 한 고법 부장판사는 "부동산 가액 등 변화를 고려하면 이번 소송은 수년간 제자리였던 위자료 상한을 끌어올리는 출발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가사소송 경험이 있는 한 판사도 "위자료 액수 자체를 예전보다 올리려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했다.
수억 원대 위자료가 '뉴 노멀'(새로운 표준)이 될지, '노소영 사건'에 국한될지는 대법원 결론에 달려 있다. 김 이사장이 손해배상 소송 항소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20억 원 위자료'의 적절성 판단은 최 회장∙노 관장 이혼소송의 상고심을 심리하는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내리게 됐다. 가정법원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대법원이 항소심 결론을 깰 경우, 불륜 상대(김 이사장)는 20억 원을 내는데 당사자(최 회장)는 책임을 줄이게 되는 결과가 돼 건드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예측 가능성과 안전성 차원에서 파기의 필요도 있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