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특허 해결" 지시하자... 발명가가 '남산'에 끌려갔다

입력
2024.08.25 15:32
홀치기 염색 특허 빼앗긴 발명가에
법원, 7억4000만원 국가배상 판결

박정희 정권 당시 '다른 회사 수출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염색 기술 특허권을 빼앗긴 발명가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부장 이세라)는 '홀치기 탈취 사건' 피해자 고 신모씨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6일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청구액 18억7,000만 원 중 약 7억4,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신씨는 1969년 직물 특수염색 기법인 홀치기에 대한 발명 특허를 등록했다. 염색을 할 대상의 일부를 실로 견고하게 묶거나 감아서 염색을 방지하고, 이후 침염법으로 염색한 뒤 감은 실을 풀면 묶은 모양의 무늬가 나타나게 되는 염색법이다. 해당 기법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자 국내에서 이를 베끼는 업체가 늘었고, 신씨는 모방 업체 26곳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1972년 5월 1심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승소 2주 후, 기자를 사칭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 요원들이 신씨를 남산 분실로 끌고 가 소송을 취하하라고 강요했다. 4일간 폭행과 협박에 시달린 그는 "소송을 취하하고 특허권 및 손해배상 청구권 등 권리 일체를 포기하겠다"는 자필 각서를 써낸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알짜배기 특허를 일순간 잃게 된 것도 모자라, 신씨는 특허 취득 과정에서 허위공문서를 작성한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특허를 심사한 상공부 담당 공무원 4명은 직위해제됐고, 신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도 이듬해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 사건 전말은 51년 만에 드러났다. 지난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 신씨가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긴 뒤 열렸던 '수출진흥 확대회의'에서 업계 불만이 제기됐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이를 '고충처리' 명목으로 받아들여 상공부 등에 사건 해결을 지시한 것이다.

국가배상소송에서도 법원은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중앙정보부의 불법행위로 신씨는 회복하기 어려운 재산적 손해와 정신적 고통을 입었을 것"이라면서 "생전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음에도 각하돼 명예회복이 좌절된 데 따른 고통도 상당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다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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