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위원이 한 명도 없어 현재 '식물 기관'이 된 방송통신위원회로 인해 공정거래위원회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방통위는 구글·애플의 인앱결제 강제 과징금 처분을 결정할 주무부처인데, 작년 10월 구글과 애플에 각각 475억 원과 205억 원의 과징금을 산정해놓고 9개월이 넘도록 의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그간 방통위 처분 이후 제재방법을 고민하겠다는 입장이었는데, 방통위 파행사태가 길어지면서 난감해하는 모습이다.
23일 본보 취재에 따르면, 공정위는 최근 구글 애플의 인앱결제 강제를 공정거래법상 시장지배적지위 남용행위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들여다보고 있다. 공정거래법은 △가격남용 △출고조절 △사업활동 방해 △진입제한 △경쟁사업자 배제 또는 소비자 이익 저해 등을 금지하고 있는데, 구글과 애플이 자사 앱으로만 결제하도록 강제(인앱결제 강제)하는 것이 '경쟁사업자 배제 또는 소비자 이익의 저해행위'로 볼 수 있을지 살피겠다는 것이다.
인앱결제 강제 금지법(전기통신사업법)은 2021년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통과됐으나,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돼왔다. 법 시행 후 구글과 애플이 제3자 결제를 허용했으나 26~27%의 높은 수수료를 부과해 기존 수수료율(30%)과 큰 차이가 없고, 결제대행업체(PG사) 수수료와 구글과 애플의 자사 앱스토어가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점을 고려하면 업체들이 제3자 앱마켓을 이용할 유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초 공정위는 방통위의 제재가 끝난 뒤 인앱결제 처벌 법리 검토에 나설 예정이었다. 방통위 제재에 '안티스티어링(Anti-steering, 다른 플랫폼·결제 수단을 연결하거나 알릴 수 없도록 하는 행위)'에 관한 내용이 어느 정도 포함됐는지를 확인한 후, 중복 처벌이 되지 않게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유럽연합(EU)에서 3월부터 시행된 디지털시장법(DMA) 여파로 애플이 앱스토어 운영 방식을 바꾸면서 공정위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한국에선 DMA법보다 처벌 강도가 약한 플랫폼법 입법에 속도가 붙지 않는 상황인데, 빅테크 기업이 미국과 유럽에서만 정책을 바꿔 '한국 소비자만 호구'가 되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실제 애플은 이날부터 EU 회원국 27개 국가에서만 사파리로 고정됐던 기본 인터넷 설정을 구글 크롬 등으로 자유롭게 바꿀 수 있도록 정책을 바꿨다. 앱스토어·메시지·사진 등 아이폰 기본 앱을 삭제하는 것도 가능해지고, 애플의 자사 앱스토어가 아닌 외부 앱스토어에서 다운받는 것도 허용했다.
당정은 제도 보완을 예고했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안티스티어링 문제와 관련해서는 방통위가 처분하지 않으면 공정위가 별도로 처분할 권한과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며 '인앱결제 강제'는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역시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구글과 애플의 인앱결제 강제 행위는 국내외 애플리케이션 개발 업체들에는 일정한 수준의 손해 감수를, 다수의 소비자에게는 과도한 비용 부담을 강제하고 있다"며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을 위해서는 법·제도적 점검과 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