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차금법) 제정에 앞장섰던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은 지난 21일 서울 망원동 지역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안 후보자 인사평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는 21대 국회 임기 시작 한 달 만인 2020년 6월 차금법 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그러나 국회가 종교계 등의 반발을 의식해 심사를 차일피일 미룬 결과 법안은 끝내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지난 총선에서 장 전 의원이 낙선한 후 이번 국회에서는 차금법 논의 동력이 상실된 상태다.
윤 대통령이 지난 12일 안창호 전 헌법재판관을 새 인권위원장 후보로 지명하면서 차금법이 재조명 받았다. 안 후보자는 저서와 강연 등에서 공개적으로 차금법 제정을 반대해 왔다. '차금법이 도입되면 에이즈·항문암 등 질병 확산을 가져올 수 있다'(저서 '왜 대한민국 헌법인가')고 주장하거나, "차금법이 가정과 교회, 국가 공동체를 해체하고 공산주의 혁명으로 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4년 전 강연)고 발언한 적도 있다. 이에 대해 장 전 의원은 "한국 정치권의 처참한 인권 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다음은 장 전 의원과의 일문일답.
-윤 대통령이 안 후보자를 발탁한 배경이 무엇이라고 보나.
"윤석열 정부는 정부 운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 보복 수단으로 인사권을 사용하고 있다. 역사관 논란에 휩싸인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등 사례도 마찬가지다. 정권 입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기관을 가장 손쉽게 마비시키는 수단으로 '인사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안 후보자는 차금법이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데.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타인을 차별할 자유를 포함하지 않는다. 세계 2차 대전을 거치며 '다른 인종을 차별해도 된다'는 인식이 얼마나 인류에게 잔혹할 수 있는지 반성한 결과 세계인권선언이 나왔다. 이를 채택한 유엔의 인권 기구들이 수차례 차금법 제정을 권고해 왔는데도 한국은 인권 후진국의 길을 걷고 있다."
-차금법 제정에 따른 다른 우려 사항은 어떻게 생각하나.
"차금법으로 동성애가 확산되고,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등 질환이 늘어날 거란 주장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에이즈 환자의 경우 사회적 낙인을 없애야 의학적 관리가 용이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초기 때 감염 환자들을 도덕적으로 지탄한 결과 그들이 숨어버려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 차금법을 도입한 유럽에서도 안 후보자와 같은 이들의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법안이 시행되고 혐오는 사라졌다. 이들 국가에서 실제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는지 안 후보자에게 되묻고 싶다.
지금 차금법 논의가 안 후보자의 '아무말 대잔치'를 둘러싼 공방으로 전개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다음 달 3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따져야 할 본질은 그의 인권 의식이 무엇인지다. 대한민국에 사회적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렇다면 동성애자 등 소수자의 부당한 차별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지 등을 물어야 한다."
-안 후보자가 차금법을 반대하는 배경에는 신앙도 한몫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안 후보자는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인사라고 볼 수 없다. 교인 중에서도 차금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에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다고 명시돼 있다. 자신의 종교관에 따라 인권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평등'이라는 헌법적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인물이 최고 인권기구의 수장으로 발탁된다는 사실 자체가 위헌적이다."
-안 후보자가 지휘하는 인권위는 어떻게 기능할 것이라고 보나.
"인권위는 지금도 인권 침해 사례에 대해 시정 권고만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징적인 역할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인권 가치를 손쉽게 부정하는 수장이 가면 한동안 '인권위 암흑기'가 열릴 수밖에 없다. 인권위는 현 시대 인권 기준의 시금석으로서 관점을 제시하는 역할이 핵심인데 스스로 권위를 무너트리게 될 것이다."
-현 정부에 비판적인 더불어민주당도 안 후보자 인사에는 반응이 없다.
"안 후보자 인사 논란의 한편에 '성경적 세계관'이 있다면, 반대편에는 정치적 부담을 우려해 침묵하는 민주당의 모습이 데칼코마니처럼 펼쳐져 있다. 인권위를 설립한 김대중 정부와 최초의 차금법이 발의된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유산을 갖고 있는 민주당은 자기 부정을 하는 셈이다. 민주당 의원들을 따로 만나봐도 '교회 표를 잃을까 두렵다'는 수준의 고민만 하고 있다. 국민 88%가 찬성(2020년 인권위 국민인식조사 결과)하고 있는데도 거대 야당은 오래된 편견에 머물고 있다."
한편 장 전 의원은 지난 총선을 앞두고 '제3지대 신당'을 도모하는 모임 '세 번째 권력'에서 활동하다 지난해 11월 탈퇴한 뒤 정의당 잔류를 결정했다. 같은 당 류호정 전 의원이 개혁신당에 합류한 것과 대비되는 행보였다. 결과는 뼈아팠다. 총선 결과 의석을 단 하나도 얻지 못한 정의당은 원외로 밀려났다. 장 전 의원은 모든 당직을 내려 놓고 지역구(서울 마포을)를 지키며 진보정당의 미래를 고민하는 중이다.
-정의당이 처참하게 유권자 외면을 받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지난해 정의당의 재창당 작업은 실패했다. 포지션(정치적 지향점) 문제가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양극화된 정치 지형에서 기존 정의당 지지층은 민주당과 연대하며 야당을 조금 더 왼쪽으로 견인하길 바랐다. 독자적인 진보정당으로서 역할하길 원했던 유권자들은 거대 양당에 주저 없이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정의당은 두 가지 모두 부응하지 못했다."
-정의당을 비롯해 진보정당은 다시 부활할 수 있을까.
"문제 원인이 명확했던 만큼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한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싶지만, 현실 여건상 당위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정치, 정당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가 싫어서 하는 투표로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정치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은 장혜영의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다운 삶에 기여하기 위해서다. 인간다운 삶이란 타인의 삶에 책임을 느끼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모아 진보정치의 미래를 고민하려고 한다. 물리적 거점은 이곳 지역 사무실이다. 이름도 '망원정x'라고 붙였다. 바랄 망(望)과 원할 원(願), 정사 정(政)을 쓴다. 말 그대로 우리가 기대하는 정치를 의논하는 프로젝트인데, 다음 달부터 본격 시작할 계획이다. 여러 분야와 협업할 예정이어서 'x(바이·By)' 옆에 빈칸을 뒀다. 22대 국회에서 정의당과 함께 사라진 의제 중 하나는 성평등 문제다. 현실 정치에 참여할 여성의 역량을 기르는 학교도 구상 중이다.
연내 발간을 목표로 책도 쓰고 있다. 국회의원 임기 4년 동안 알게 된 것들과 문제의식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정치인의 책무다. 임기 중이었기 때문에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담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