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의 보이지 않는 '제3전선' 여론전... 러 "하이브리드 공격" 발끈

입력
2024.08.22 19:00
14면
우크라, SNS·서방 언론으로 '제3전선' 확장
인도주의 과시...징집병 무기력한 모습 전파
러 "서방 언론 활동, 하이브리드 공격 개입"

#.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러시아 군인이 수풀 사이를 기어다닌다. 우크라이나군의 무인기(드론)는 하늘에서 물, 안내 사항이 적힌 편지를 떨어뜨린다. 그 자리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신 군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또 다른 군인은 드론을 향해 '엄지 척'을 해보이기도 한다. 항복 의사를 보인 군인들은 드론의 안내를 받아 우크라이나 특별수용소로 이동한다.

우크라이나군이 19일(현지시간) 텔레그램 계정에 '전장의 군인들이 러시아군의 생존과 항복을 도운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공유한 영상이다. 참혹한 전장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덕분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물론이고 외신 보도를 통해서도 확산하는 중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제3의 전선'을 펼치고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투가 시작된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이 '제1전선', 최근 들어 우크라이나군이 진군하고 있는 러시아 본토 쿠르스크 지역이 '제2전선'이라면, SNS와 서방 언론을 활용한 '여론전'이 바로 그것이다.


책·TV 보며 안정 취하는 러 포로 공개

우크라이나군은 지난 6일 병력 수천 명을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에 투입, 허를 찌르는 기습 공격에 나섰다. 그러면서 미국 워싱턴포스트(WP) 등 서방 언론의 현지 취재를 허용했다. WP는 '우크라이나군의 호위' 속에 쿠르스크 지역에 함께 들어갔고, 우크라이나군의 통제 범위를 실시간으로 기록하며 러시아 현지 주민들의 상황도 보도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러시아인들이 혼비백산하며 대피하는 모습이 그대로 공개됐다. 러시아 정부는 당혹감에 빠졌다.

러시아군 포로를 '제네바 협약'에 근거해 대우하는 면모도 과시했다. 21일 프랑스의 국제전문보도채널 프랑스24는 러시아 포로를 수용 중인 우크라이나의 비밀 시설을 취재해 보도했다. 영상은 "전쟁에 안 가면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본국에선 우크라이나를 네오나치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는 러시아 군인의 목소리를 전파했다. 이들이 음식과 책, TV를 제공받으며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는 내용도 담겼다. 프랑스24는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이 (적국의) 포로를 어떻게 다루는지 세계에 보여 주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러 "서방 언론 취재 활동은 '그림자 전쟁' 개입"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그림자 전쟁'이라며 발끈하고 있다. 그림자 전쟁이란 사이버 공격, 허위정보 유포 등을 통해 적에 균열을 내는 전략이다. 이른바 '하이브리드 공격'으로도 불린다. 통상 러시아가 서방 국가를 상대로 사회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 쓰는 전술인데, 이번에는 자신들이 당한 꼴이 됐다. 실제로 최전선에 투입된 비숙련 징집병의 무기력한 투항 모습이 최근 서방 언론에 보도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리더십에도 금이 갔다.

러시아의 불안감 내지 조바심은 최근 당국자들 발언에서도 엿보인다. 지난 19일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서방 언론들의 그런 행동(쿠르스크 현장 취재)은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하이브리드 공격 실행에 직접 개입한 증거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모든 사실은 세심하게 기록되며 가해자에 대해 적절한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실제로 16일 이탈리아나 미국 언론의 쿠르스크 현지 보도에 항의하기 위해 자국 주재 이탈리아 대사, 미국 대리대사를 초치하기도 했다.




이혜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