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와 말복이 지난 지 한참이고, 더위가 물러난다는 처서가 어제였지만 바깥은 아직도 염천이다. 폭염일수 관련 기상관측 기록을 전부 갈아 치우고도 생존을 위협할 만한 무더위는 여전하다. 그럼에도 오늘 쳐다본 아파트 앞 대왕참나무와 백합나무 잎은 무성하게 그늘을 만들고, 잎은 반짝거리며 윤기가 흐르고 있다. 그늘 한 곳 없는 논과 밭에서는 때맞춰 벼가 패고 콩이 영글고 과일이 익고 있다. 한두 시간만 밖에 있어도 일사병에 걸릴 것 같은 뜨거운 뙤약볕에서 식물들은 어찌 저리도 잘 견디며 자라는 것일까?
식물은 기온 변화와 같은 환경 스트레스 대응능력이 동물보다 탁월하다. 동물과 달리 식물은 생존에 불리한 환경이 돼도 피하거나 장소를 바꾸기 어렵기 때문에 진화 과정에서 다양한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생리유전학적 방어 기작을 잘 갖췄기 때문이다.
식물도 고온이 되면 기공으로 수분을 증발시키는 증산작용으로 체온을 유지한다. 사람이 땀을 흘리는 것과 유사한 목적과 과정이다. 볕이 강해지면 잎의 표면에 큐티클층을 생성해 반짝거리게 만든다. 빛과 열을 반사하고 자외선으로부터 잎을 보호하기 위한 반응이다. 잎에 있는 엽록체는 높은 광도의 빛과 자외선에 노출되면 빛이 닿는 면적을 줄이기 위해 세포 측면에 빛과 평행하게 배열해 자신을 보호한다.
여러 연구를 통해 급격한 온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발현하는 다양한 종류의 열충격 단백질(Heat shock proteins) 유전자들도 밝혀졌다. 고온 피해를 막는 세포 내 항산화 기작과 스트레스 반응을 조절하는 아브시스산(Abscisic acid) 등 식물 호르몬의 역할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종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대개 식물 유전체(genome)의 크기는 동물보다 크다. 사람의 유전체는 약 30억 개의 염기쌍(3Gb)이지만 양파는 150억 개, 잣나무는 무려 270억 개의 염기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식물의 유전체가 커진 이유는 광합성과 더불어 환경 스트레스 극복에 필요한 체내 활동이 동물보다 훨씬 다양하기 때문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사람보다 훨씬 작은 유전체를 가진 벼가 금년 같은 폭염에도 잘 자라는 것과 유전체의 크기를 연관시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아무튼 사람은 견디기 힘든 뜨거운 날씨에도 식물들은 잘 자라고 있다. 디스토피아 배경의 여러 SF영화에서처럼 인류의 멸종은 식물보다 앞설 것이 자명하고, 식물의 번성에 의존해 생존하고 있는 우리가 식물보다 고등하다고 하는 것은 맞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