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간첩 의혹' 필리핀 전 시장의 해외 도주… "말레이→싱가포르→인니"

입력
2024.08.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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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국 당국에 출국 기록 전혀 없어
대통령궁 "안보 위해 여권 취소해야"

‘중국 스파이’ 의혹을 받아 온 필리핀 소도시의 시장이 해외 도주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필리핀 여성 신원을 도용한 중국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황에서, 현지 수사 당국 감시망을 피해 달아나기까지 하자 ‘간첩설’도 더욱 힘을 얻는 분위기다.

21일 영국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필리핀 대통령 직속 조직범죄방지위원회(PAOCC)는 필리핀 북부 루손섬 타를라크주(州) 밤반시의 전 시장 앨리스 궈(35)가 해외로 도피했다고 밝혔다.

도주는 약 한 달간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궈는 지난달 18일 인도네시아 덴파사르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이동했고, 사흘 뒤(21일)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이달 18일 싱가포르에서 페리를 타고 인도네시아 바탐섬에 간 것으로 파악됐다.

궈가 언제, 어떻게 출입국 당국 감시망을 뚫고 필리핀을 떠났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라피 툴포 필리핀 상원의원은 “이민국 심사 과정 없이 전세기를 타고 출국했을 수도 있다”고 점쳤다. 당초 인도네시아로 입국했던 그가 여러 나라를 거쳐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간 경위도 불투명하다.

농촌 소도시인 밤반시의 시장이었던 궈는 지난 3월 필리핀 수사 당국이 시장실 바로 뒤에 위치한 중국계 온라인 도박장을 단속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당국은 이곳에서 중국인 202명을 포함, 감금돼 있던 약 700명을 구출했다. 조사 결과 이곳은 사람들을 가두고 온라인으로 이성에게 접근해 돈을 뜯어내는 ‘로맨스 스캠’ 범죄 소굴로 드러났다. 궈는 도박장 부지(약 7만9,000㎡) 절반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출신 배경과 경력도 모호했다. 올해 6월 필리핀 국가수사국은 궈의 지문이 2003년 중국에서 필리핀으로 입국한 여성의 것과 동일하다고 판단했다. 필리핀 여성 신분을 도용해 정계에 진출했다는 의미다. 필리핀과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싸고 2년 가까이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궈와 중국의 연계 정황이 속속 드러나자, 그가 중국이 심은 간첩일 수 있다는 의혹은 더 짙어졌다.

필리핀 정부는 이후 궈의 직무를 정지하고 금융 자산을 동결했다. 상원도 국회 청문회 참석 거부 혐의로 그의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궈의 변호인은 “실제로 나라를 떠났다는 증거는 없다. 궈는 여전히 필리핀에 남아 있다”고 해명했지만, 정부는 그의 도주를 기정사실화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도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전날 엑스(X)에 “국민 신뢰를 저버리고 궈의 도주를 도운 범인을 찾아 책임지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통령궁은 21일 외교부에 “국가 안보를 위해 궈의 여권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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