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9일, 정부는 핑크빛 배경으로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공식 선언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오랜만에 듣는 '국가비상사태' 치고 화사했다. '인구전략기획부'를 신설하고, 대통령실 내 '저출생대응수석실'도 출범시키고,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인구 비상대책회의'로 전환했다. 신설, 출범, 전환까지 해나가며 "총력을 기울이겠다"라고 했다.
"0~4세 인구가 북한 인구보다 적은 것은 해방 이후 최초"라며 저출생 문제로 인해 "국가 시스템 붕괴가 우려되는 매우 엄중한 상황"이라고 했다. "단편적인 접근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다차원의 고차방정식"을 풀어보겠다며 15개 핑크빛 핵심과제를 발표했다. 돌봄 문제를 두고 이주 가사 노동자를 싼값에 들여와 떠맡긴다고 했다. (돌봄은 비용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인데?) 9억 원짜리 집을 살 수 있게 5억 원까지 대출해주겠다고 했다. (이게 부동산 대책이 아니라 저출생 대책이라고?) 보육·교육시설의 돌봄 시간을 밤늦게까지 연장하겠다고 했다. (초등학생들 야간자율학습 시키려고?) 저출생 정책은 암울한 핑크빛으로 맴돌았다.
이후 지난달 29일에 열린 '인구 비상대책 2차 회의'에서 "저출생 대책의 속도감 있는 이행과 추가 과제 발굴로 추세 반전에 총력"을 다하겠다며 1호 대책으로 일명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라고 불리는 결혼준비 서비스와 관련한 불공정 사항을 직권조사해 점검하겠다고 했다. 이쯤 되면 '웃기려고 이러는 건가?' 생각하게 한다.
2016년 행정안전부가 대한민국 출산 지도를 제작한 적이 있다. 한반도 전체가 가임기 여성의 숫자에 따라 지역별 순위가 매겨져 핫핑크, 인디고 핑크, 베이비핑크, 코랄 핑크로 시각화됐다. 가임기 여성을 출산의 국가적 자궁으로 재현한 것이다. 저출생 대응 정책으로 출산 장려를 거듭해서 외치며, 재생산을 통한 경제성장과 미래의 국가 발전이라는 인구통치 논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한 세대가 미래 세대를 재생산해, 경제적 활력의 기초로 국가와 가정을 연결 짓는 '재생산 미래주의'가 응축된 지도였다.
문학평론가 리 에델만은 "후손을 생산하고, 생물학적 세대의 연속성을 담보하며, 순진무구한 아이의 이미지로 추상화된 유토피아"를 유지하는 가부장적 전술로 '재생산 미래주의'가 작동한다고 본다. 오직 재생산 가능한 이성애 중심, 유성애 중심의 미래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고, 전통적 결혼제도에서 벗어난 비생산적 퀴어한 인구들은 배제된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임기 여성과 남성은 '국가 시스템 붕괴가 우려되는 매우 엄중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국가의 재생산 도구로 호출된다.
"출산 장려를 위해 젊은 여성들이 춤을 춰야 한다"라며 괄약근을 조이는 케겔 운동을 저출생 대책으로 내놓고, "아이를 낳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맞춤형 정책"이라며 정관을 복원하는 수술비를 지원하고, "향후 적령기 남녀가 서로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여성 1년 조기 입학을 제안하는 장면들을 보다 보면, 막막해진다.
결혼-출산-양육-일·가정 양립이라는 전형적인 정책 세트 구성을 아무리 펼쳐놓아도, 출생의 문제를 경제적 전망에 따른 인구의 문제로만 다루는 이상, 추상적인 인구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의 문제로 다루지 않는 이상, 출생률이 오를 가망은 없다.
이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의 저출생 현상을 풀어낼 포괄적 대책으로 많은 전문가와 석학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성평등'을 이야기한다. 저출생 문제를 돌파해나가고 있는 유럽 여러 나라들의 사례를 통해 이미 검증된 '성평등'을 저출생 문제를 풀어낼 기본기이자 핵심으로 지목하고 있다.
저출생 현상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육을 받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무급이고 조건도 열악한 돌봄 노동, 그리고 가정 밖에서의 기회가 제한되는 데 대한 반발로 일종의 출산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낸시 폴브레)인데, 인구통치를 중심으로 한 "저출산 대책이 실효성을 얻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젠더 평등 관점이 부족했다는 점에 있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2)라는 것이다. "한국 저출생 위기의 근본 원인은 '성차별적 사회구조'다. (…) 한국이 성평등을 이루기 전까지 출산율 반등은 어려울 것"(제이 컵 펑크 키르케고르)이라는 진단은 인구통치로서의 출산장려 정책이 아니라 성평등 관점에서 젠더·가족·아동 정책의 중요성을 지속해서 강조해야 한다고 국내외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런데, 들리지 않나 보다.
국가가 주도하는 재생산 미래주의에서 젠더 불평등은 괄호 쳐지고, 성평등은 발음되지 않는다. 2018년부터 가속화된 2030 청년 여성의 고용불안과 그로 인한 심리적 고통이 배경화되어 '조용한 학살'이라고까지 불리며,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게 높은 여성 청년 자살률 급증(이민아, 2023)에 대한 대책은 괄호 쳐진다. 28년째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남여 임금 격차 31.2%(통계청, 2024)에 대한 대책도 괄호 쳐진다. 25~29세 여성의 고용률이 73.9%로 생애 최고에 이르지만, 35~39세엔 60.5%(여성경제활동백서, 2023)로 뚝 떨어지며 한국에서만 유난히 도드라지는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의 골짜기를 보여주는 M자형 고용 그래프에 대한 대책도 괄호 쳐진다. 해소되지 않는 성별 노동 분업과 착취는 여성 노동을 저임금·장시간·비정규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고 있다. 일상적 비상사태가 장기 지속되는 동안 '미래'는 전망도, 가망도 없이 망한 몰골로 드러날 뿐이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첫 회의를 주재하면서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성평등'이라는 단어를 발음하지 않았다. 물론 국가비상사태 선언에서도 '성평등'이라는 말이 금지어라도 되는 것마냥 발음되지 않았다. 2023년 성격차지수(Gender Gap Index·GGI)가 전 세계 146개국 가운데 105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젠더 불평등 국가의 위상에 걸맞게 "한국 사회에 구조적 성차별은 없고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며 성평등 정책 전담 부처 폐지를 내세웠고, 여성폭력 방지 사업 및 피해자 지원 예산을 대폭 삭감했으며, 각종 정책 언어에서 '여성'과 '성평등'을 지워냈고, 일터에서 성차별과 성폭력 피해를 본 여성들을 최전선에서 지원해왔던 민간고용평등상담실을 폐지했다. 그렇게 해놓고서는 저출생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가를 총동원하겠다는 엄포를 놓는 것을 보고 있자면 105위도 높아 보인다. 미래가 위독하다.
"둘째는 언제 낳으려고? 하나로는 부족하지... 요즘 나라에서 다 키워주겠다고 하던데." 주변 어르신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하도 많이 받아서 대답을 정해주었다. '대신 좀 키워주시겠어요?' 이 대답 하나면, 추가 질문 없이 자리를 마무리할 수 있다. 어르신들도 안다. 황혼 육아만큼은 피하고 싶은 노후라는 걸 말이다. 그렇다고 둘째 생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마음 한쪽에는 결혼을 조건으로 세금 깎아주는 정책이 아니라, 전 국민 고용보험 가입으로 육아휴직 제도를 모두가 쓸 수 있게 된다면? 일에 쫓겨 밤늦게까지 아이를 돌봄교실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돌봄에 충분한 시간을 쓸 수 있게 노동 조건이 개선된다면? 출산을 조건으로 한 현금성 지원정책이 아니라, 안정적인 미래를 구상하고 도모해나갈 수 있는 현실적인 양육수당이 보장된다면? 존망을 건 파격적 전환을 기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