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의 한계를 다룬 이전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민사소송에서 원고와 피고가 권리 여부를 두고 다툴 때, 법원은 원고에게 입증 책임을 부과한다. 개인 피해자가 원고, 가해자인 국가가 피고인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도 마찬가지다. 시간·돈·자료 등 모든 것이 부족한 개인에게 입증 책임을 부과하다 보니, 매우 명확한 과거사 피해 사건에서도 피해자가 패소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떠오르는 대안이 국가 상대 손배소 관할을 행정법원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사소송이 아닌 행정소송으로 이 문제를 풀자는 얘기. 국가의 책임을 물리는 일에 '공법(公法)적인 성격'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동시, 재판부의 주도적 조사권을 강화하자는 취지다.
'제2의 염전노예 사건' 피해자로 알려진 박영근씨 사례를 보자. 지적 장애를 가진 그는 2014년 7월부터 전남 신안군의 염전에 감금돼 노역에 시달렸다. 2021년 탈출해 지방고용노동청에 진정을 넣었는데, 박씨는 "당시 근로감독관이 장애 여부조차 확인하지도 않고 합의만 종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난해 4월 국가를 상대로 "3,500만 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걸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소장을 낸 곳이 서울행정법원이라는 것. 그간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은 '민사사건으로 취급한다'는 통설에 따라 일반 지방법원에서 1심을 맡는 게 관행이었다. 행정소송은 '행정청의 처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 데 반해, 국가배상 소송은 국가에 '금전 지급'을 요구하는 게 주된 목적이므로 '사인 간 채권 다툼'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법원이 어디냐가 무슨 대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차이는 행정소송법 26조(직권탐지주의)에 있다. 재판부로 하여금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조항이라, 증거 제출 책임을 오로지 당사자 몫으로 두는 민사소송법상 '변론주의'와 대립된다. 이 덕에 국가배상 소송을 행정소송으로 하면 개인 부담은 덜고, 합리적 판단의 가능성은 커질 수 있다는 게 행정소송 찬성론자들의 주장이다.
비록 행정법원 심판을 받고자 했던 박씨의 시도는 기각 결정이 확정되며 수포로 돌아갔지만, 법조계에선 '행정소송화'의 필요성을 말하는 목소리가 있다. 박현정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7월 한 토론회에서 "손해의 공평 분담을 목적으로 하는 민법상 손해배상 사건과 달리, 국가배상 제도는 위법 행정작용에 대한 사법적 통제수단으로 의미가 있다"며 "행정법원의 전문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법부 내부에선 안철상 전 대법관이 2022년 전원합의체의 '긴급조치 9호' 사건에서 낸 별개의견이 대표적이다. 그는 "국가배상 사건은 원칙적으로 '당사자 소송'으로 다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짚었는데, 행정법원 부장판사 시절인 2007년에도 "국가배상 사건은 실질이 행정처분의 위법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행정법원 관할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문을 냈다.
입법을 통해 관할을 변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대법원이 2006년 국회에 제출한 행정소송법 개정 의견과 법무부가 2007년,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시도한 행정소송법 개정안은 모두 국가배상 소송을 당사자 소송의 하나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별다른 반대의견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개정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무산됐고, 이후 관련 논의는 지지부진했다.
수도권 소재 한 고법판사는 "최근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 접수 건수가 늘면서 현직 법관들 사이에서도 이를 행정소송으로 다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면서 "개인이 국가 보유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관할 법원은 고민해 볼 문제"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