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의 한계를 다룬 이전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법으로 국가를 이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국가와 개인 간 소송은 그야말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싸움. ①먼저 조직 문제가 있다. 국가는 소송을 위해 정부법무공단(공공 로펌)이란 전담조직을 두면서, 필요시 민간 로펌까지 투입한다. 가용 재원·인력이 무한대다.
②시간도 국가의 편. 특히 과거사 소송에선 피해자가 고령이라 빠른 진행이 필요하지만, 국가는 절차나 자료 제출 등을 핑계 삼아 소송 과정을 지연시킬 수 있는 힘이 있고, 아무리 긴 소송도 버틸 능력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서도 있는 일이니 그렇다 쳐도, 바로잡을 수 있음에도 안 고쳐지는 게 바로 ③정보의 불균형이다. 원·피고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소송의 대원칙은 실제론 잘 지켜지지 않는다. 특히 원고에게 입증 책임이 주어지는 민사소송의 특성 때문에, 과거사 사건의 경우 수사권도 없는 개인(피해자)이 일일이 국가의 수십 년 전 잘못을 드러내야 한다. 국가와 개인은 이미 보유한 자료 양에서부터 엄청난 격차가 있다. 국가가 작정하고 자료를 숨겨 버리면 개인 입장에서 받아낼 방도가 없다.
이 정보 불균형 문제를 잘 보여준 소송이 있다. 휴게소에서 호두과자를 팔며 생계를 꾸리던 가장이 하루아침에 '성폭행범'으로 몰려 구속됐다. 바로 '곡성 성폭행 누명 사건'의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이다.
2015년 12월이었다. 당시 56세이던 김현승(가명·65)은 누군가 빌라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갔다. 문 앞엔 술에 취한 중년 여성 A씨가 있었고, 자꾸 현승씨 보고 성폭행했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취객이라 생각해 무시했지만, 여성의 항의가 반복되자 결국 112 신고로 경찰을 불렀다.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사건은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A씨는 경찰에서 현승씨가 자기 조카 B(당시 19세·지적장애인)를 성폭행했다고 진술했고, 경찰은 A·B 두 사람 진술만 믿고 사건을 진행했다. 범행장소로 지목된 모텔의 폐쇄회로(CC)TV도 확보하지 않았다. 검찰도 그대로 기소했고, 1심 법원도 증언만으로 징역 6년을 선고했다.
누명은 항소심에 가서야 풀렸다. 현승씨 딸이 직접 나서 증거를 모으고 B씨를 설득했다. 알고 보니 진범은 A씨의 남편, 그러니까 피해자 B의 고모부였다. B씨가 항소심에서 고모부 범행을 털어놓으면서, 현승씨는 무죄를 받아낼 수 있었다. 고모인 A씨가 조카 B씨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한 사실도 드러났다.
근본적인 잘못은 A씨 부부가 했지만, 국가기관의 과오도 컸다. 초기 수사를 부실하게 한 경찰, 경찰이 넘긴 걸 검증 없이 기소한 검찰, 무죄추정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법원 등 국가 사법작용의 총체적 실패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현승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다. 결과는 어땠을까.
졌다. 지난해 5월 대법원은 곡성 성폭행 누명 사건 피해자 김현승의 패소를 확정했다.
누가 봐도 현승씨가 이겼어야 할 소송은 왜 이런 결과로 이어졌을까. 자료 확보 때문이었다. 국가 상대 소송에서 현승씨는 한 장의 '경찰 수사보고서'를 꼭 확인하고자 했다. 현승씨에게 누명을 씌운 A씨는 사건 2년 전 전남 함평군에서 "내 조카가 마을 이장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신고를 넣었다. 현승씨 사건과 꼭 닮은 이 사건 역시 A씨가 조카에게 허위진술을 강요하면서 시작됐다. 그 사건의 결론은 달랐다. 검찰은 '함평 사건'에선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현승씨를 조사한 경찰관은 함평 사건의 존재를 몰랐을까, 알고도 눈 딱 감고 수사를 진행한 것일까. 궁금증은 항소심 법원의 문서제출명령 덕에 매우 단편적으로 해소됐다. 수사기관이 제출한 수사보고서 목록엔 ‘함평 사건’이 적혀 있었다. 목록엔 그 기록을 전체 보고서에 편철한 사람 이름까지 적혀 있었는데, 그는 바로 현승씨 사건 담당 경찰관이었다. A씨와 조카가 누명을 씌운 전력을 알고 있었음에도, 수사를 진행했다는 얘기다.
그 경찰관은 1심 법정에 나와 "알았다면 수사방향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함평 사건'을 몰랐다고 주장해 왔다. 이 편철자 이름은 그 경찰관의 법정 증언과 배치되는 증거였고, 이것은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를 국가배상의 원인으로 정한 헌법 조항에 그대로 들어맞는 조각이었다.
목록을 봤으니, 목록에 적힌 수사자료를 봐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진실을 찾고자 했던 현승씨의 시도는 '목록 확보'에서 멈췄다. 국가는 보고서 이름만 적힌 목록 외에 해당 기록은 제공하지 않았다.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은 불응해도 강제할 방법이 없다. 현승씨 사건에 '함평 사건'을 편철한 이유를 알 수 없게 돼 버린 것이다. 민사소송법상 '공무원 또는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그 직무와 관련해 보관하거나 가지고 있는 문서는 제출을 거부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도 국가의 불응을 뒷받침했다.
김씨의 국가 상대 소송 대리를 맡았던 법무법인 원곡의 최정규 변호사는 "함평 기록을 봤다면 얼마나 유사성이 있는지, 왜 ‘곡성 사건'을 놓쳤는지 드러날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재판부도 해당 문서 열람을 원했지만 더 이상 수단이 없이 제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현행 민사소송 제도로는 법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는 지적, 이건 판사들 사이에서도 계속 나오는 목소리다. 한 재경지법 부장판사는 "심리를 해보면 오래전 국가의 불법행위는 입증 자료가 거의 없는 수준"이라면서 "국가의 불법행위, 특히 인권 침해 사건은 입증 책임을 완화하거나 국가의 적극적 입증을 강제하는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안으로 꼽히는 건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다. 원·피고 양측이 재판에 앞서 각자 서로 필요한 자료를 공개하도록 하는 절차다.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시,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을 거부하면 상대방 주장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고 패소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지금보다 쉽게 확보할 수 있다. 그래서 법정 내 정보 불균형을 해소하고 한 발짝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장치로 꼽힌다.
2022년 법원행정처는 '디스커버리 제도 연구반'을 1년간 운영하고 민사소송법 개정을 제안했다. △자신의 인식에 반하는 진술 또는 소송자료 제출을 금지하는 진실의무 도입 △문서제출명령 위반 시 제재 수단 강화 △증언녹취 제도(법원 관여 없이 상대방 또는 제3자를 신문하도록 하는 제도) 도입 등을 골자로 한다. 디스커버리 제도의 완전한 도입은 아니지만, 현행 제도 한계를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반영한 민사소송법 개정안들은 21대 국회에서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법원행정처는 "연구반 연구를 토대로 문서제출명령제 개편과 증언녹취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민사소송법 개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입법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