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의대 증원에 반발한 전공의들의 수련병원 집단 이탈로 의료공백 사태가 시작된 이래 간호사 10명 중 6명이 전공의 업무를 강요받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대한간호협회(간협)가 20일 밝혔다. 이처럼 현행법 사각지대에서 의사 업무를 대신하는 진료지원(PA) 간호사를 법적으로 보호하겠다며 정부가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사업 대상 병원 참여율은 40%에 미치지 못한다고도 지적했다. 간협은 "병원을 지키고 있는 간호사들을 보호하려면 간호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간협은 서울 중구 협회 서울연수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간호사 업무 관련 시범사업'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해당 시범사업은 정부가 전공의 이탈에 따른 의료공백을 메우려 수련병원·종합병원 소속 PA 간호사가 수행할 수 있는 의료행위 100개를 정해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으로, 지난 2월 27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간협 실태조사는 6월 19일부터 7월 8일까지 시범사업 대상에 속하는 387개 병원의 간호사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응답 간호사의 62.4%는 병원이 전공의 업무를 일방적으로 강요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37.2%는 '사전에 설명을 들었지만 일방적으로 이뤄졌다', 25.2%는 '사전에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했고 일방적으로 이뤄졌다'고 각각 답했다. 전공의 업무 수행에 동의했다고 응답한 47.6% 중에서도 절반가량(22.7%)은 '원하지는 않았지만 동의했다'고 답했다. 간협은 "현장 간호사들은 병원이 30분에서 1시간 정도만 교육한 후 업무에 투입하거나 교육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며 불안해 한다"며 "교육 프로그램이 따로 없어 수련의 업무를 간호사가 간호사에게 가르치는 일도 있다"고 덧붙였다.
조사 대상 병원 가운데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곳은 39%에 불과했다. 탁영란 간협 회장은 "시범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병원에서 전공의 업무를 강요받는 PA 간호사라면 법적인 보호마저 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업무 범위나 책임 소재가 불명확한 상태에서 의료사고가 나면 PA 간호사에게 책임이 전가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간협은 의사 집단행동으로 병원이 경영난에 빠지면서 채용되고도 발령받지 못한 간호사가 많다고 지적했다.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 47개 상급종합병원에서 신규 채용된 간호사의 76%가 발령을 받지 못했다. 탁 회장은 "발령을 빌미로 신규 간호사에게 전공의 업무를 강요하는 불법적인 사례도 나오고 있다"고 성토했다. 상급종합병원 31곳은 내년 신규 간호사 채용 계획이 없어 간호대 졸업반 학생들의 취업 경쟁이 심해질 전망이다.
탁 회장은 "간호사들은 국민 생명과 환자 안전을 끝까지 지키고자 의료현장에서 버티고 있지만 이들을 보호할 법체계는 너무 허술하다"고 비판했다. 이어 "환자를 저버린 건 의사인데도 간호사에게만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라며 "간호사들이 환자 간호에만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간호법 제정에 국회와 정부가 함께 나서달라"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