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민턴 국가대표 안세영의 기자회견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파리 올림픽 금메달로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안세영에게 주목되는 순간, 그는 스포츠계의 변화를 촉구하는 발언을 기자회견과 SNS를 통해 쏟아냈다.
"선수들이 보호되고 관리돼야 하는 부분 그리고 권력보단 소통에 대해서 언젠가는 이야기 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하고픈 이야기들에 대해 한 번은 고민해 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어른이 계시길 빌어봅니다." "시스템, 소통, 케어 부분에 대한 서로의 생각 차이를 조금씩 줄이고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상식선에서 운영되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합리적인 시스템 아래에서 선수가 운동에만 전념하며 좋은 경기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안세영은 파장이 커지자, 8월 16일 자 SNS에 "올림픽 우승 후 인터뷰 자리에서 부상에 관한 질문에 지난 7년간의 대표팀 생활이 스쳐 가며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하게 되었는데, 그 말의 파장이 올림픽 기간에 축하와 격려를 받아야 할 선수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며 사과까지 했다. 문제 제기의 시기와 방법이 지혜롭지 못했다며 자세를 낮췄다. 극한 대결로 치닫는 요즘 정치권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시스템 개선을 바라는 문제 제기는 신선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문제를 개인 불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치부하며 '안세영의 눈높이가 손흥민과 김연아 수준'이라는 인신공격성 발언은 치졸하기 짝이 없다. 그가 제기한 구조적 문제는 그동안 스포츠계 전반에 걸쳐 오랫동안 묵인되어 오던 것들이다. 안 선수는 기자회견과 SNS 등에 여러 번 '시스템'이라는 표현을 쓰며 개인 문제가 아닌 '시스템'을 문제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정확한 관점이다. 협회 위주의 진상조사위가 꾸려졌지만,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며 벌써부터 말이 많다. 이렇게 진행된다면 희생양을 만드는 데만 초점이 맞춰지고, 시스템 개선까지 나아가지 못한 채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세월호, 용산참사 등 대형참사의 처리과정에서도 '누구를 처벌할 것인가'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예방과 재발 방지를 위한 근본적 시스템 구축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해 왔던 게 우리 현실이다. '누구를 처벌할 것인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집단적 광기가 발휘되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최후의 관심은 '시스템이 어떻게 개선되었나'에 집중돼야 한다.
안세영이 쏘아올린 작은 공은 한국 스포츠계의 변화와 개혁을 촉발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돼야 한다. 협회 운영 방식이 투명해지고, 선수 선발 공정성이 학연이나 다른 요인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돼야 하고, 선수들의 자율성과 권익이 보장되면서 최상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도 마련돼야 한다. 모든 선수는 스포츠의 주인공이다. 선수가 존재해야 협회도 존재하고 감독도 존재하는 것이다.
실력과 패기로 무장한 젊은 선수들의 겸손하면서도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을 보라!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배하고도 상대에게 다가가 포옹하는 신유빈, 다친 선수를 부축하고 함께 시상대에 오르는 박태준, 금메달을 딴 후 기쁜 마음을 억누르고 상대 선수를 찾아가 포옹하며 위로하는 김우진, 경기 중 넘어진 선수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는 오상욱! 이들에게 꼰대 같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낡은 시스템이 장애가 되어서야 하겠는가.
이들과 더불어 안세영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스포츠계에서 출발하여,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정치권에도 커다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길 기대해 본다. 안세영이 바꾸고 싶은 것은 요넥스나 나이키가 아니라 낡은 '시스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