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쉴 새 없이 뭍으로 쓰레기를 토해 냈다. 반쯤 부서진 슬리퍼와 잔뜩 해진 옷가지를 집어 포대에 던져 넣기 무섭게, 파도가 부서진 자리에 이번에는 페트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다음에는 누군가의 한 끼 식사가 됐을 통조림 캔과 반쯤 깨진 쓰레받기가 나왔다. 배를 정박할 때 쓰는 노끈, 빨대와 비닐봉지, 심지어 수영복까지 해변에 밀려들었다. 주워도 주워도 끝이 없었다. 바닷속에서 쓰레기가 복사된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7월 2일 필리핀 중부 비사야 제도 네그로스섬 네그로스 오리엔탈주(州) 최남단 시아톤시(市) 수말리링 해변은 겉과 속이 달랐다. 수도 마닐라에서 비행기로 1시간, 공항에서 차량으로 다시 2시간을 달렸더니, 반짝이는 모래와 파란 형광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술루해(海), 그리고 알록달록한 방카(필리핀 전통 고기잡이배)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 호강은 거기까지였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하지 않았나. 모래사장에 들어서자 부식된 금속 캔과 술병, 빨대와 폐그물 등 온갖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글씨를 보니 대부분 필리핀에서 나온 것으로 보였지만, 한국 델몬트 오렌지에이드 캔, 신라면 포장재, 대만 인쉐 과자 봉지, 일본 닛신 컵라면 등 동아시아 국가 쓰레기도 눈에 띄었다. 해변 쪽으로 시선을 옮겼더니, 생수통과 플라스틱 일회용 컵 등이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이고 있었다.
네그로스는 루손, 민다나오, 사마르에 이어 필리핀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지만, 북서부 대도시 바콜로드(인구 60만 명)나 동남부 대표 휴양지 두마게티(14만 명)와 비교하면 최남단에 자리 잡은 시아톤(8만 명)은 외지인이 많이 찾지 않아 한적한 편이다. 대도시나 휴양지도 아닌 이런 시골 마을까지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60년 가까이 방카를 탄 어부 페르난데스 라존(68)에게 바닷속 상황은 어떤지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밀려온 쓰레기를 그대로 두면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돌아간다. 해양 쓰레기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눈에 띄는 대로 주워야 한다. 네그로스 오리엔탈 일대에서 활동하는 독일 비영리 해양 보존 단체 프로오션과 팔을 걷어붙인 이유다. 3시간도 안 됐는데 200L짜리 대형 포대 열 자루가 쓰레기로 가득 찼다.
쓰레기 무게는 총 200㎏. 생수병, 콜라병처럼 가벼운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PET)가 네 포대(10㎏) 나왔다. 농약통이나 석유통처럼 웬만해선 찌그러지지 않는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재질 플라스틱(3㎏)과 유리(45㎏), 금속 캔(8㎏)도 한 포대 가득 담겼다. 나머지 134㎏은 버려진 어망과 전자 기기, 낡은 옷과 신발처럼 재활용 불가 쓰레기다.
시골 마을에 왜 그렇게 해양 쓰레기가 많은 걸까. 혹시 오랫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아 잔뜩 쌓였던 걸까. 프로오션 해양 수거팀 리더 로즈 앤(24)은 단호하게 ‘아니다’고 말했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수말리링 해변을 청소한 시점은 6월 28일. 나흘도 안 돼 바다가 새 쓰레기를 육지로 실어 보냈다는 얘기다.
바스티안 귄터(32) 프로오션 대표는 “그나마 해양 쓰레기가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다면 나은 편”이라며 차량으로 30분가량 떨어진 시아톤의 라탕곤 해변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모래사장 한쪽으로 맹그로브 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곳이다.
오후 3시. 만조 때 들어왔던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감춰져 있던 맹그로브 뿌리가 드러났다. 삐죽 솟아난 어린 뿌리에는 찢긴 마스크와 각종 식료품 포장 비닐, 폐그물이 얼기설기 감겨 있었다. 바스러진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조각도 모래톱처럼 뻘 곳곳에 박혀 있었다. 쓰레기가 해안가 바위와 나무에 부딪혀 깨지고 마모된 탓이다. 귄터 대표가 말했다.
시아톤시로 이동하기 전날 살펴본 바다 밑도 청정 지대는 아니었다. 7월 1일 필리핀 해양 보존·연구 비영리단체 ‘해양보호필리핀(MCP)’ 소속 자원봉사자들과 공기통을 메고 네그로스섬 삼보앙귀타시(市) 말라타파이 앞바다로 들어갔다.
처음엔 ‘필리핀 10대 다이빙 포인트’로 불리며 전 세계 다이버들을 끌어모으는 아포섬에서 8㎞ 남짓 떨어진 까닭에 ‘열대 바다의 화려한 산호 군락을 잠시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하지만 바닷속에 몸을 던지자마자 그런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수심 15m 바닥에는 깨진 플라스틱 부이와 풍선처럼 보이는 고무 조각, 칫솔과 일회용 포크, 배터리가 말라버린 해초와 뒤엉켜 있었다. 어민들이 즐겨 찾는 어장이 아닌데도, 버려진 낚싯줄과 어망도 바닥 곳곳에 있었다. 수면을 향해 둥실 떠오른 비닐 봉투는 영락없는 해파리처럼 보였다. 찢어진 1회용 믹스커피와 샴푸 봉지, 사탕 포장 비닐도 해수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30분가량의 짧은 수중 청소 작업이 끝나자 봉사자들이 가져간 쓰레기 수거용 어망은 ‘육지의 물건’으로 가득 찼다. 스위스에서 온 자원봉사자 크리스티안(20)은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가 물고기만큼 많아서 놀랐다”고 말했다.
수많은 해양 쓰레기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자원봉사자를 이끌고 온 다이브 리더 유안(34)에게 물었다. “다른 나라에서 버려진 뒤 떠밀려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필리핀 내에서 발생한 쓰레기예요. 마닐라 같은 대도시에서 마구 버린 생활 쓰레기가 해류를 타고 내해(內海)까지 떠내려온 거죠. 필리핀에 크고 작은 섬이 7,600개가 넘는데 다른 섬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해변과 바닷속을 꼼꼼히 살펴보지 않아도 필리핀의 해양 쓰레기 문제는 숫자만으로도 심각성이 확인된다. 비영리 환경단체 오션클린업 연구팀은 2021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필리핀에서 매년 35만 톤의 플라스틱류 폐기물이 제대로 수거되지 못하고 바다로 흘러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전 세계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이다.
영국 옥스퍼드대가 운영하는 통계 사이트 ‘아워월드인데이터’ 역시 2021년 보고서에서 “전 세계 해양 플라스틱의 81%가 아시아 각국의 강을 통해 유입되고, 그 가운데 필리핀의 비중이 3분의 1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게 끝이 아니다. 지구상에서 해양 플라스틱 오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하천 10개 가운데 7개가 필리핀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강’으로 불리는 수도 마닐라의 파시그강에서만 매년 6만3,000톤에 달하는 쓰레기가 유출된다. 필리핀이 국제사회에서 ‘해양 쓰레기 발원지’라는 오명을 얻은 것도 심각한 하천 오염 때문이다.
실제로 7월 3일 마닐라를 남북으로 가르는 27㎞ 길이 파시그강에 도착하자 짙은 녹색 강물이 악취를 내뿜으며 하류를 향해 흘렀다. 강물 위에는 온갖 쓰레기는 물론 분뇨까지도 쉴 새 없이 지나갔다. 강 하구를 한 시간 가까이 살펴보는 동안 부유 행렬이 멈춘 적은 1초도 없었다. 페트병부터 일회용 컵, 커피 봉지, 유리병 등 네그로스섬 해안에서 봤던 쓰레기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시민들은 강을 쓰레기통처럼 이용했다. 강변에 길게 형성된 판자촌에 앉아있던 한 여성은 갓난아기의 기저귀를 교체한 뒤 돌돌 말아 익숙한 듯 강으로 던졌고, 강변 그늘에 앉아 식사하던 일꾼도 먹고 난 1회용 플라스틱 그릇을 아무렇지도 않게 물속으로 투하했다.
마닐라 주재 한국 공공기관의 한 주재원은 “지금 보는 모습도 지난 5월 마닐라 시당국이 1,000여 명을 동원해 대대적인 쓰레기 제거 작업을 벌이면서 그나마 깨끗해진 것”이라며 “그전까지는 뒤덮인 쓰레기 때문에 강에 물이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렇게 하천에 마구 버려진 쓰레기는 마닐라만(灣)을 거쳐 술루해와 맞닿은 민도로해협과 남중국해로 흘러간다. 다음 행로는 아무도 모른다. 필리핀에는 파시그강처럼 ‘해양 쓰레기 원흉’으로 꼽히는 오염된 강이 500개가 더 있다.
필리핀 환경단체와 시민사회 전문가들은 필리핀 바다와 하천이 '쓰레기 지옥'이 된 이유에 대해 ①쓰레기 처리 인프라 부족 ②무분별한 투기 ③빈곤 ④느슨한 정부 정책이 맞물린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필리핀에는 쓰레기 폐기·재활용 시설이 매우 부족하다. 2022년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1,400만 명이 밀집해 사는 마닐라의 경우 배출하는 쓰레기의 60% 정도만 수거되고 있다. 마닐라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선 수거율이 40%대로 떨어진다. 마리아 안토니아 로이자가 필리핀 환경부 장관이 올해 초 자국 쓰레기 수거·재활용 수준을 ‘유아기 단계’라고 평가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다.
수거·재활용 시스템이 엉망이다 보니, 빈민촌 등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지역과 하천 주변 거주민들은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집 앞 하천과 강으로 연결되는 하수구에 쓰레기를 마구 쏟아버린다.
모든 쓰레기가 천대받는 것은 아니다. 3일 마닐라 북서쪽에 위치한 필리핀 대표 빈민가인 톤도에 들어서자, 어른은 물론 청소년들까지 대형 포대에 담긴 폐플라스틱을 정리하고 있었다. 재활용이 가능한 것과 아닌 것을 나누고, 띠지 등을 제거하는 게 이들의 일이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판매 가능한 고철과 플라스틱을 분류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톤도의 한 수거업체에서 페트병을 정리하던 안젤로(16)는 “단단한 플라스틱 통이나 페트병은 1㎏에 20페소(478원)를 받을 수 있어 인기가 높지만, 쉽게 망가지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이나 비닐류 폐플라스틱은 선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택받지 못한’ 쓰레기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안젤로에게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입을 닫았다. 이에 대한 대답은 세계자연기금(WWF)의 2018년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플라스틱 폐기물의 약 80%는 플라스틱 필름과 봉지 등 저가형이지만 수거업체는 주로 페트병, HDPE 같은 고가치 플라스틱에만 집중한다. 일부 수거업자는 연료비와 매립비를 줄이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폐기 장소로 이동하다가 수로에 쓰레기를 버린다.’
기자를 톤도로 안내한 마닐라 비영리재단 블레스더칠드런 활동가 조슬린(43)은 “소포장 제품에 의존하는 생활 습관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가난 때문에 식료품이나 생활용품을 큰 통으로 구입할 여력이 없어요. 그래서 보통 ‘사리사리’라고 불리는 동네 작은 가게에서 작은 봉지 제품을 조금씩 자주 구매해요. 저기 보세요, 모두 소분해서 팔고 있죠?”
조슬린이 손으로 가리킨 상점에는 10g 또는 20g 단위로 포장된 식음료와 세제 비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콜라 등 탄산음료도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190㎖ 용량이 많다. 세계은행은 “필리핀에서 매일 약 1억6,300만 개의 ‘1회 분량’ 생활용품이 소비된다”며 “해양 오염을 가속화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느슨한 대응은 가뜩이나 심각한 해양 쓰레기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필리핀 의회는 지난 수년간 △재활용 센터 설립 △고형 폐기물 투기 금지 △생산자 책임 확대 등 플라스틱 폐기물을 포함한 각종 쓰레기를 줄일 수 있는 법안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를 어기더라도 처벌받는 경우가 많지 않은 데다 이행 속도도 매우 느리다.
예컨대 24년 전 제정된 고형 폐기물 관리법은 2006년까지 쓰레기 투기를 전면 금지하고 위생 매립지로 전환하는 게 핵심이지만, 현재 위생 매립지는 전국적으로 237개에 불과하다. 반면 불법 쓰레기 투기장은 여전히 1만 개가 넘는다. 현지매체 인콰이어러넷은 지난해 "자산가치 1억 페소(약 24억 원)가 넘는 기업을 대상으로 쓰레기 폐기물 처리 책임을 높이는 법안(생산자 책임 확대 법안)이 통과됐지만, 준수 상황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형편없다"고 꼬집었다.
한국에서 필리핀까지는 직선거리로 2,600㎞. 멀리 떨어진 동남아시아 국가의 바다가 해양 쓰레기로 뒤덮였다고 해서, 우리에게 당장 피부로 와닿는 위협은 아니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필리핀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의 쓰레기 수거·재활용 인프라도 필리핀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먼 나라 해양 쓰레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프로오션 귄터 대표에게 물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세계 최악’이라는 필리핀의 해양 쓰레기 문제가 언젠가는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일보 특별취재팀
팀장 : 유대근 기자(엑설런스랩)
취재 : 진달래·원다라·이서현 기자(엑설런스랩), 조영빈(베이징)·허경주(하노이) 특파원, 한채연 인턴기자
사진 : 이한호·최주연·정다빈 기자
영상 : 박고은·김용식·박채원 PD, 제선영 작가, 이란희 인턴PD
※<제보받습니다> 한국일보는 해양 쓰레기 문제를 집중 취재해 보도해 나갈 예정입니다. 해양 쓰레기 예산의 잘못된 사용(예산 유용, 용역 기관 선정 과정의 문제 등)이나 심각한 쓰레기 투기 관행, 정책 결정 과정의 난맥상과 실효성 없는 정책, 그 외에 각종 부조리 등을 직접 경험했거나 사례를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다면 제보(dynamic@hankookilbo.com) 부탁드립니다. 제보한 내용은 철저히 익명과 비밀에 부쳐집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