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극복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이탈리아 흑인 배구선수 벽화, 공개 하루 만에 훼손

입력
2024.08.14 16:10


인종차별로 인한 역경을 딛고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이탈리아에 사상 첫 여자 배구 금메달을 안겨준 '영웅' 파올라 에고누를 기리는 벽화가 공개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훼손됐다. 인종차별자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이탈리아 정치권을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3일(이하 현지시간) 이탈리아 일간지 일메사제로에 따르면, 길거리 화가 라이카라가 전날 로마 이탈리아 올림픽위원회(CONI) 본부 외벽에 그린 에고누의 그림이 훼손됐다. 누군가 에고누의 검은색 피부를 분홍색 스프레이로 덧칠한 것이다.

에고누는 미국과의 이번 올림픽 여자 배구 결승에서 홀로 양 팀 최다인 22득점을 올리며 팀의 우승을 견인해 '이탈리아 배구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탈리아에서 여자 배구는 남자 축구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지만, 그간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던 탓에 올림픽 금메달은 이번이 사상 처음이다. 이 때문에 라이카라는 에고누의 활약을 기리고자 12일 그가 스파이크하는 모습을 올림픽위원회 본부 외벽에 그렸고, 그간 에고누에게 가해진 인종차별을 멈춰달라는 취지로 "이탈리아다움. 인종차별, 증오, 외국인 혐오·무시를 멈춰달라"는 문구를 달았다. 하지만 라이카라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그림이 훼손되면서 이탈리아 내부적으로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에고누를 향한 인종차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나이지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인 에고누는 이탈리아에서 나고 자라 14세 때 이탈리아 국적을 취득했다. 하지만 검은 피부색 때문에 어려서부터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올림픽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화장실 일화'도 그중 하나다. 어린 시절 선생님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3번이나 말했지만, 선생님은 재차 안 된다고 했고, 결국 어린 에고누가 실수를 하자 비웃는 표정으로 "맙소사, 너 정말 냄새가 심하구나. 흑인들은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국가대표가 되고 나서도 에고누를 향한 인종차별적 발언과 행위는 끊이지 않았다. 도리어 극우들의 비난은 갈수록 거세졌고, 에고누는 결국 2022년 "인종차별적 모욕과 메시지 때문에 힘들었다. 쉬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대표팀 은퇴를 시사하기도 했다. 당시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 등을 비롯해 각계 응원이 쏟아지면서 겨우 대표팀 유니폼을 다시 입었고, 결과적으로 사상 첫 금메달을 따내며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에고누 벽화 훼손 사실이 알려지자 정치권이 먼저 들고일어났다. 이탈리아 외교부 장관이자 부총리인 안토니오 타야니는 에고누에 연대를 표하며 "저속한 인종차별적 행위에 경멸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고, 체육부 장관인 안드레아 아보디도 "무지와 무례, 무의식을 처부수기 위해 존경과 교육이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 올림픽 위원회의 한 위원도 "문명의 대학살"이라며 "이는 우리를 중세시대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화가 라이카라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종차별은 이탈리아가 치유해야 할 추악한 암"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그림은 지나가던 행인이 검은색 마카로 엉성하게 복원해놓은 상태다.


김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