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정지 7년, 너무 더딘 고리 1호기 해체... 20조 원 시장 언제 열리나

입력
2024.08.24 09:00
후쿠시마 핵연료 잔해 반출 시도 실패
고리 1호기 해체 계획 여전히 '심사 중'
제염 위한 사전 작업 이제야 로봇 투입
"탄탄한 트랙 레코드 쌓아야 해외 진출"

도쿄전력이 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 후 원자로에 남은 핵연료 잔해 반출을 22일 처음 시도했지만, 약 1시간 30분 만에 장비 설치가 잘못돼 작업을 중단했다. 당초 2021년 착수 예정이었던 잔해 반출이 연기를 거듭하다 여태 시작도 못 한 것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을 2051년까지 폐기하겠다는 약속이 지켜질지 불투명하다. 원전 해체가 얼마나 어려운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부산 기장군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해체도 더디긴 마찬가지다. 2017년 6월 영구정지됐는데, 23일 원자력안전위원회에 따르면 고리 1호기 최종해체계획서는 여전히 '심사 중'이다. 당초 정부가 제시한 △2022년 6월까지 최종해체계획서 승인 △2025년 12월까지 사용후핵연료(원전에서 전기를 생산하고 남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냉각 및 반출 △2032년 말 해체 작업 종료라는 시간표는 무의미해졌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세계 영구정지 원전 210기 중 해체가 끝난 건 10%(21기)에 그친다. 정부와 업계는 원전 해체 시장 규모가 국내 10조~20조 원, 세계 500조 원이라며 장밋빛 전망을 내세웠지만, 후쿠시마와 고리에서 보듯 원전 해체는 결코 쉽지 않다.

고리 1호기 어떻게 해체하나

고리 1호기에는 '햄스터(HAMSTOR)'란 이름의 4족 보행 자율주행 로봇 2대가 들어가 있다. 한국수력원자력 중앙연구원이 개발한 키 48㎝, 무게 20㎏의 이 로봇은 지난 5월부터 등에 달린 센서로 위험 구역의 방사선량을 측정하고 있다. 원자로가 정지된 이후에도 남아 있는 방사성 물질을 닦아내기(제염) 위한 사전 작업이다.

제염은 최소 13년 이상 걸리는 원전 해체의 첫 단계다. 한수원 관계자는 “해체 과정에서 작업자와 인근 주민의 피폭 사고가 없어야 하기에 제염이 가장 중요하다”며 “자체처분 가능한 수준까지 제염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자체처분이란 원전 폐기물의 방사선량을 자연 수준(연간 약 2.4밀리시버트(mSv))으로 낮춰 일반폐기물처럼 처분하는 방식을 말한다.

남아 있는 방사성 물질이 가장 많은 곳은 ‘1차 계통’이다. 두꺼운 콘크리트 격납건물 안에 있는 원자로와 냉각재 펌프, 증기 발생기 등은 1차 계통, 격납건물 밖에 있는 발전기, 터빈 등은 2차 계통에 속한다. 1차 계통의 핵심 구조물인 원자로에선 우라늄이 중성자를 맞아 쪼개지는 핵분열이 발생하는데, 이때 막대한 열과 방사선이 나온다. 따라서 원자로와 인접한 1차 계통 부품들은 방사선량이 높고, 1차 계통과 두꺼운 차폐벽으로 분리돼 있는 2차 계통은 상대적으로 낮다.

제염 방식은 대상에 따라 다양하다. 정재학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계통 부품과 배관에 쌓인 방사성 물질은 산화막 형태로 존재하니 옥살산·과망간산 같은 화학약품이 섞인 제염액을 뿌리면 제거된다"고 설명했다. 설거지할 때 그릇에 남은 기름과 양념을 세제로 벗겨내듯이 제염액을 뿌리면 산화막을 없앨 수 있다. 이와 달리 모래를 고압으로 뿌리는 '연마 블래스팅' 방식도 있다. 한수원 관계자는 "모래를 세게 분사하면 표면이 약간 파이면서 겉에 붙어 있던 산화막도 같이 떨어져 나간다"고 했다.

원전에는 온도를 낮춰 과열에 따른 폭발을 막고 방사선을 내뿜는 핵연료를 보관하기 위한 물이 담긴 수조가 있다. 수조를 제염할 땐 '하이드로 제트' 기술을 쓸 수 있다. 슬라임(액체형 장난감) 같은, 방사성 물질을 흡수하는 끈적한 물질을 수조에 분사하는 방식이다. 콘크리트로 만든 원전 외벽은 표면을 직접 깎아내거나 열을 가해 녹여 제염할 수도 있다.

뿌려지고 남은 제염액이나 수조에 담긴 물은 별도로 처리해야 한다. 윤종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원자력및양자공학과 교수는 "액체를 필터나 이온교환수지로 보내 방사성 물질을 분리한다"며 "걸러진 방사성 물질은 시멘트로 덮는 등 고체로 만들어 방사선 세기에 따라 처분하고, 남은 액체는 증발시킨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고준위 방폐물 처분

제염을 마친 부분은 작게 절단한다. 방사성폐기물 부피를 줄이고 오염이 적은 부분을 재사용하기 위해서다. 절단 크기나 횟수는 방폐물 처분 용기(우리나라는 200리터 드럼)에 들어가게끔 조절한다. 제염했어도 방사성 물질이 남아 있을 수 있어 방사성 물질이 어느 정도 차폐되는 물속에서 원격 기술로 절단해야 한다. 보통 로봇이나 레이저, 플라스마로 자르거나 아예 녹일 수도 있다.

절단까지 마쳐야 원전 철거가 가능하다. 한수원은 원자로와 멀리 떨어진 비(非)방사선 구역부터 해체하는 '콜드 투 핫(Cold to Hot)' 전략을 택했다. 오염 구역부터 해체하는 '핫 투 콜드(Hot to Cold)' 방식은 해체 기간과 비용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으나, 작업 초기 사고가 나면 방사성 물질이 비방사선 구역까지 퍼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한수원 관계자는 "비방사선 구역 해체는 7년, 방사선 구역 해체는 4년 정도 걸릴 것"이라며 "오래 걸리더라도 더 안전한 방식을 택해 해체 경험을 쌓겠다"고 말했다.

고리 1호기를 해체하면 200리터 드럼 8만~10만 개 수준의 방폐물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한수원과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은 "방폐물 감용 기술을 적용하면 1만4,500개 정도로 줄어들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방폐물은 방사성 물질에 얼마나 오염됐느냐에 따라 고·중·저·극저준위로 나뉜다. 원자력환경공단 관계자는 "해체로 나오는 방폐물의 97%는 중준위 이하"라며 "부품과 배관은 제염 정도에 따라 중·저준위, 원전 외벽은 극저준위로 분류될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방폐물은 차폐 운반 용기에 담겨 경북 경주시 중·저준위 방폐물 처분장에 옮겨질 예정이다.

문제는 사용후핵연료를 비롯한 고준위 방폐물이다. 원전을 해체하려면 원전 내 습식 저장조(수조)에 담긴 사용후핵연료를 밖으로 빼내야 하는데, 국내엔 이를 처분할 시설이 없다. 사용후핵연료 저장과 관리를 위한 법안은 여야 줄다리기에 밀려 지난 국회에서 자동 폐기됐다 이번 22대 국회로 넘어왔지만, 아직 뚜렷한 진전이 없다.

"국내 원전 해체부터 해내야"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022년 '원전 해체 글로벌 경쟁력 강화 협의회'를 개최해 원전 해체 기술 수출 의지를 내비쳤다. 민간도 관심이 많다. 같은 해 현대건설은 미국 원자력 기업 홀텍 인터내셔널과 원전 해체 협력 계약을 맺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공정 연구, 화학 제염, 구조물 절단 등 해체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고리 1호기 해체 기술 개발에는 두산에너빌리티, 한전KPS 같은 산업체부터 울산과학기술원(UNIST·유니스트), 한양대 등 학계까지 폭넓게 참여하는 중이다.

해체 산업이 본격화하고 기술을 수출하기 위해선 고리와 월성 1호기 해체부터 성공적으로 해내는 게 우선이다. 원자력업계 관계자는 "국내 원전 해체를 잘 마쳐서 탄탄한 트랙 레코드(사업 실적)를 쌓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해체 승인 절차와 관련 기술 개발, 사용후핵연료 처분 시설 확보에 속도를 내야 한다. 김용수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명예교수는 "실무 경험을 갖춘 해체 인력을 양성하고, 로봇을 활용한 자동화 기술의 비중도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윤 교수는 "해체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민 설명회도 정기적으로 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하연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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