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1917~1979) 당시 대통령이 김재규(1926~1980) 중앙정보부장 총탄에 시해됐다. 10·26이라는 숫자와 박정희, 김재규라는 이름이 묶음으로 소환되고는 하나 그때 그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김재규의 수행비서관이었던 박흥주(1939~1980)도 그중 한 사람이다. 14일 개봉하는 영화 ‘행복의 나라’는 박흥주(영화 속에서는 박태주)의 사연을 지렛대로 불우했던 시대를 들춰낸다.
박태주(이선균)는 시해 사건 발생 30분 전 ‘거사’ 가능성을 김영일(유성주)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통보받는다. 박태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현역 육군 대령이라서다. 그는 군법에 따라 단심 재판을 치르게 된다. 김영일 등을 위해 변호인단이 꾸려지나 박태주를 맡겠다는 이는 없다. 변호인단은 돈만 밝히는 변호사 정인후(조정석)를 지명도 상승을 미끼로 합류시킨다. 재판을 이기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인후는 새롭게 등장한 시대의 불의와 조금씩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아이러니한 상황들로 이야기를 전진시킨다. 태주는 시해 사건 가담자 중 유일하게 단심으로 재판을 치러야 한다. ‘명령 복종’이라는 군인의 최우선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의 아이러니는 재판 중에서도 드러난다. 검사는 직속상관 명령에 따라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시해 사건에 가담한 게 제대로 된 명령 수행이냐고 추궁한다.
인후의 상황도 아이러니하다. 그는 정반대 편에 선 두 군인과 싸워야 한다. 원칙주의자인 태주는 인후가 넘어야 한 첫 산이다. 태주는 자신을 3심까지 받게 하고 싶은 인후의 의도에 완강히 저항한다. 군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자기가 살기 위해 상관인 영일을 곤경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법정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곳”이 아니라 “이기는 게 중요한 곳”으로 여기는 인후로서는 상대하기 힘든 의뢰인이다.
떠오르는 권력인 보안사령관 전상두(유재명)가 인후의 또 다른 적이다. 시해 사건을 국가 전복 사건으로 단정한 상두는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선 김영일과 박태주 등에 대한 일사불란한 선고와 형 집행이 필요하다. 엘리트 군인들인 태주와 상두 중 참된 군인이라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일까. 영화는 사건 발생 45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을 긴장감 넘치는 법정 다툼 속에 심어 놓았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이선균의 유작이다. 팬들을 실망시킨 일이 있었다고 해도 스크린 속 그의 모습은 연민과 눈물을 부른다. 특히 태주가 감방에서 벽에 머리를 찧으며 자책하는 장면은 처연하다. 스크린 밖 이선균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로 관객 1,232만 명을 모은 추창민 감독이 ‘7년의 밤’(2018)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배우들이 두루 호연하는데 조정석과 유재명의 연기가 특히 눈길을 잡는다. 정인후는 박흥주를 변호했던 태윤기(1918~2012) 변호사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인물이다. 12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