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광복절에 이승만 전 대통령을 미화한 다큐멘터리 영화 ‘기적의 시작’을 방영하기로 하면서 각계의 반발이 거세다. 객관성이 결여된 내용이란 이유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에서 독립영화로 인정받지 못한 데다, 이 전 대통령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대한민국 건국과 연결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공영방송이 광복절에 내보내는 영화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민족문제연구소 등 언론·시민단체 41곳은 12일 서울 영등포구 KBS본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기적의 시작’의 방영 결정 철회를 촉구했다. 81분간 이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117만 명이 본 '건국전쟁' 열풍에 힘입어 올해 2월 개봉했고, 2만6,000명이 봤다. KBS는 15일 79주년 광복절을 기념해 교양프로그램인 ‘독립영화관’을 특별편성해 이 영화를 내보낸다.
KBS 노조 등은 “영화는 '이 전 대통령은 친일파나 독재자로 평가받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며, 대한민국 건국은 이승만 한 명의 지대한 업적'이라는 일방적 주장을 펼친다”며 “더 큰 문제는 4·19 혁명, 제주4·3 사건 , 여순사건 등 이미 법으로 (의미가) 정립된 한국 근현대사 전반을 부정한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제주 4·3기념사업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윤석열 정부가 4·3을 왜곡·폄훼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을 임명한 데 이어 KBS가 그 대열에 합류하는 시도를 한다”고 비판했다.
영화는 3·15 부정선거가 이 전 대통령과는 무관하게 아랫사람들의 권력욕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묘사했다. 또 4·19혁명은 이 전 대통령이 누명을 쓴 사건이고 이 전 대통령의 하야는 ‘위대한 결단’이라고 표현했다. 또 4·3 사건 등은 좌익 세력이 주도했다고 규정했다. 제주 4·3기념사업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윤석열 정부가 4·3 왜곡·폄훼 인사를 기관장에 임명한 데 이어 KBS가 그 대열에 합류하는 시도를 한다”고 비판했다.
KBS는 '독립영화관'을 편성했으나 영진위는 이 영화를 독립영화로 인정하지 않았다. 영화 제작·각본도 맡은 권순도 감독은 지난해 10월과 올해 1월 영진위에 독립영화 인정을 신청했지만 “객관성이 결여됐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권 감독은 기독교와 우파 사상을 중심으로 한 영화와 다큐를 만들었고,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2022)도 4·3을 왜곡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제대로 나라를 만들려면 기독교를 근본으로 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대사를 비롯해 영화의 지나친 기독교적 세계관도 논란이다. 범불교시국회의는 “정교분리를 규정한 헌법을 부정한 것이고 종교 간 갈등을 불러올 우려가 크다”고 반발했다.
공영방송에서 내보내기엔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 측은 “1990년대 재연 방송에서 나올 법한 조악한 내레이션, 노래방 화면을 연상시키는 재연 장면 등 양질의 독립영화를 소개해 온 독립영화관에서 방영할 수준인지 의문이 든다”고 밝혔다.
KBS 제작 실무진은 이 영화 편성에 반대했다. 역사를 왜곡하고 극장 관객 수에 비해 KBS가 영화 제작사에 지불해야 할 비용이 너무 크다며 방송권 구매를 거부했다. 구매를 관철시킨 김동윤 KBS 편성본부장은 “(질적인 면보다) 의미로 가는 영화”라며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주목해 달라고 직원들에게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KBS는 “독립적인 편성권에 의해 방송 편성을 결정했다”며 “광복절을 맞아 다양성 측면에서 해당 다큐 영화를 선정해 방송하게 된 것”이라는 공식 입장을 냈다. 그러나 KBS는 지난해 박민 사장 취임 이후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 제작을 중단시키고 지난달에는 현장 중계를 하는 기자 노트북에 붙어 있던 노란 세월호 추모 리본을 모자이크 처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