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은 시작됐다”…’제47기 명인전’서 남녀 차세대 주자 ‘돌풍’

입력
2024.08.1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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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종 8단, 45기 우승자인 신민준 9단에 승리
김은지 9단, 위태웅 6단 따돌리고 상승세 이어
최다(13회) 우승자 이창호 9단, 김정현 9단 제쳐
신구 세대 간 치열한 각축전…전망 불투명

“이젠 어디까지 성장할지, 궁금해집니다.”

미심쩍었던 의구심은 기대감으로 바뀐 듯했다.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됐던 불안감 대신 안정감이 더해졌단 측면에서 주어진 후한 평가였다. K바둑 채널에서 ‘제47기 SG배 한국일보 명인전’(우승상금 7,000만 원) 방송 해설위원으로 나선 백홍석(38) 9단이 “반상(盤上) 운영 능력에서 눈에 띄게 좋아졌다”며 치열한 예선을 뚫고 본선에서도 맹활약 중인 2명의 남녀 다크호스에 대해 내비친 관전평이다. 백 위원의 눈에 들어온 기대주는 문민종(21) 8단과 김은지(17) 9단. 백 위원은 “성장 속도가 빨라진 문 8단과 김 9단 덕분에 이번 명인전도 재미있게 됐다”며 “두 선수는 이미 이번 대회에 경계 대상으로 떠올랐다”고 주목했다.

국내 최고 권위의 프로바둑 종합기전인 ‘명인전’이 본선으로 접어들면서 우승컵을 향한 반상 경쟁도 달아오르고 있다. 특히 이번 명인전 본선은 예년과 달리, 처음으로 명함을 내민 신진 세력과 베테랑들의 신구 세대 간 각축전으로 전개되면서 또 다른 볼거리도 제공하고 있다. 실제, K바둑 차세대 주자로 주목된 문 8단과 김 9단의 돌풍에 이어 역대 명인전 최다(13회) 우승자인 ‘살아있는 전설’ 이창호(49·8월 기준 국내 랭킹 79위) 9단은 이번 명인전에서 요즘 상승세인 김정현(33·10위) 9단에게 승리, 9년 만에 종합기전 8강에 선착했다.

스포트라이트는 문 8단이 먼저 가져갔다. 문 8단은 지난 7일 열렸던 이번 명인전 16강전에서 당초 예상을 깨고 난타전 끝에 강자인 신민준(25) 9단에게 승리했다. 지난 ‘45기 명인전’ 우승자인 신 9단은 국내 랭킹 3위로, 3년 전엔 세계 메이저 기전인 ‘제25회 LG배 기왕전’(우승상금 3억 원) 타이틀까지 따냈던 검증된 강펀치의 소유자다. 더구나 이번 명인전 16강전 직전인 지난달 30일엔 ‘제29기 GS칼텍스배 프로기전’(우승상금 7,000만 원)도 우승, 오름세를 탔던 터였다. 그랬던 신 9단이었기에 이번 명인전 16강전에선 문 8단보단 신 9단에게 무게 중심이 기울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신 9단조차 최근 물오른 문 8단에게 발목이 잡혔다. 올 들어 문 8단의 기세는 말 그대로 수직 상한가다. ‘2023~24’ KB국민은행바둑리그 정규시즌에선 4승 6패로 다소 부진했지만 큰 게임인 포스트시즌에선 파죽의 5연승을 거둔 데 이어 챔피언결정전에선 중국의 초일류 기사인 구쯔하오(26) 9단마저 잡아내면서 팀의 우승까지 견인했다. 구쯔하오 9단은 세계 메이저기전인 ‘제2회 란커배 세계바둑오픈전’(우승상금 180만 위안, 한화 약 3억4,000만 원) 결승에 진출, K바둑의 간판스타인 신진서(24) 9단과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진검승부를 예고한 상태다. 그동안 국내외 주요 신예기전에서 다수의 우승컵을 수집, 일찌감치 차세대 주자로 낙점됐지만 상위권 기사들까지 참가한 본격 기전에선 번번이 뒷걸음질쳤던 문 8단이 ‘2023~24 KB리그’ MVP 수상을 계기로 만개한 모습이다. 문 8단은 “다소 서둘렀던 대국 기풍이 조금 보완이 된 것 같다”며 “이번 명인전에선 결승전까지 가보고 싶다”고 포부를 전했다.

요즘 K바둑계의 '뜨거운 감자'인 김 9단 역시 이번 명인전을 발판으로 확실한 스타 반열에 올라설 태세다. 김 9단은 지난 8일 벌어졌던 이번 명인전 16강전에서 만만치 않았던 위태웅(31) 6단을 제물로 최근 12연승의 신바람도 이어갔다. 말 그대로 브레이크 고장 난 기관차처럼 폭주 중인 김 9단의 이런 행마에 랭킹은 덤으로 따라오고 있다. 지난 5일 한국기원에 따르면 8월 랭킹에서 김 9단은 2013년 12월 여자랭킹에서 1위에 등극한 이후, 지난달까지 무려 128개월 연속 지존의 자리를 지켜왔던 최정(28) 9단을 밀어내고 새로운 현재권력으로 등재했다. 아직까지 최 9단과 상대전적에선 5승 14패로 열세란 측면에서 세대교체를 논하기엔 빠르단 시각도 있지만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김 9단은 지난해 12월 벌어졌던 ‘제7회 해성 여자기성전’(우승상금 5,000만 원) 결승전에서 최 9단을 따돌리고 타이틀 획득에 성공, 기다렸던 우승컵도 들어올렸다. 김 9단은 또 3번기(3판 2선승제)로 현재 진행 중인 ‘2024 닥터지(Dr.G) 여자최고기사결정전’(우승상금 4,000만 원) 결승 1국에서 위력적인 반상 운영을 선보이면서 최 9단에게 승리, 유리한 고지도 점령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김 9단은 올해에만 52승 16패(승률 76.47%)로, 현재까지 남녀 프로기사 통합 승률 부문에서도 3위를 달릴 만큼 폭발적이다. 이 가운데 여자 프로기사들을 상대로 한 전적은 24승 3패(승률 88.89%)로 압도적이다. 덕분에 김 9단의 8월 남녀 통합 랭킹은 전월 대비 15계단이나 수직 상승한 32위까지 치솟았다. 김 9단은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다”면서도 “랭킹은 가능하다면 20위권 내 진입을 노려보겠다”고 말했다.


허재경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