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30분, 잠에서 깼다. 징글징글한 열대야 그리고 열린 창밖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 탓이었다.
세수하고 나와서 TV를 켰다. 태권도 58kg급 박태준과 가심 마고메도프(아제르바이잔) 간 결승전이 막 시작되는 참이었다. 지난밤 저 친구가 준결승에서 세계 1위 모하메드 칼릴 젠두비(튀니지)를 가볍게 제치고 결승전에 올라가는 걸 보고 잠들었다. 고교 시절 3년간 단 1패만 기록하며 ‘태권 초신성’으로 불렸다는 소문은 괜한 수식어가 아니었다. 금메달을 놓고 겨루는 이 경기에서 박태준은 몸에 용수철이라도 단 듯 뛰어올랐다. 소년미 물씬 풍기는 그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앞차기와 뛰어차기, 돌려차기와 뒤후려차기 기술을 선보일 때마다 “저게 바로 태권도지” 혼자 흥분해서 박수를 쳐댔다.
흡사 태권도 시범단의 화려한 기술 시연처럼 펼쳐진 경기를 보는 동안 솟구쳐 나온 아드레날린으로 인해 쉬이 잠이 오지 않을 듯했다. 공중제비 돌기로 금메달 세리머니를 하는 박태준의 모습을 지켜보다 집을 나섰다.
부옇게 밝아오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어린아이 하나가 소나무로 둘러싸인 공터에서 기합 소리를 내며 제법 야무지게 돌려차기를 해대다가 나를 보고는 멈칫했다. 가장자리 벤치에 60대가량 되는 남성이 앉아있었다. 아이의 할아버지였다. 더위에 잠을 설친 이 조손(祖孫)도 박태준이 금메달 따는 경기 장면을 막 보고 나왔다고 했다. 품새가 아주 멋지던데, 태권도를 배운 적 있느냐고 아이에게 물었다. 여섯 살부터 학원에 다니기 시작해 4년째 태권도를 배우고 있다며 수줍게 웃었다. 그러니 아이에게 이 새벽의 올림픽 태권도 결승전은 얼마나 신나고 인상적이었을까.
그들의 행복한 시간을 더는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눈인사를 나눈 뒤 산책로 모퉁이로 접어드는데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이번 여름은 더워도 참 좋았다고 기억될 것 같아요. 할아버지랑 같이 올림픽도 보고 새벽마다 산책도 하고요.” 가볍게 내뱉는 한숨 소리와 함께 아이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지구가 점점 더 뜨거워진다고 하니까 그게 정말 걱정이에요. 이번에 친환경 올림픽을 계획했던 것도, 파리가 생각보다 너무 더워지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들었거든요.”
“그러게. 기후변화가 심상치 않구나. 여름이 제아무리 맹렬해도 광복절만 지나면 맥을 못 추고 누그러들었는데 올해는 8월 말까지 열대야가 계속된다고 하잖니. 아주 늦기 전에 자연의 경고를 귀담아듣고 실천하는 지혜가 필요하거든.”
“태권도 돌려차기를 연습하는 것처럼, 꾸준히 노력해서 화난 자연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는 앞으로 할아버지랑 같이 열 번도 더 넘게 올림픽을 보고, 이렇게 새벽 산책을 하는 게 소원인데...”
두런두런, 올림픽 정신과 기후 변화와 탄소발자국을 둘러싸고 둘 사이 진지한 대화가 10분 넘게 이어졌다. 총명한 손자에 현명한 할아버지였다.
바위에 걸터앉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는 사이 날이 부쩍 더워지고 나는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얼른 들어가서 두어 시간이라도 자고 일어나야 오늘 하루를 자연스럽게 시작할 터였다. 도둑고양이처럼 집으로 걸어가며 기원했다. 바라건대, 저 아이의 걱정이 기우이기를. 자연의 섭리가 예측 가능한 그것으로 머물러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