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미국의 진정한 첫 고속철도(America’s true first high-speed rail line) 건설을 시작하기 위해 네바다에 있다.”
지난 4월 22일(현지시간) 미국 교통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에 이렇게 밝혔다. 미국 철도업체 브라이트라인 웨스트가 서부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LA) 옆 샌버너디노카운티의 랜초쿠카몽가에서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남쪽까지 이어지는 351㎞ 길이 고속철도 공사에 공식 착수했다고 알린 날이었다.
업체에 따르면 이 철도 위를 달리는 고속열차의 최대 시속은 322㎞(200마일)가 될 전망이다. 아직 미국 열차의 속도는 시속 250㎞ 아래다. 2028년 7월 LA에서 열리는 하계올림픽에 맞춰 해당 구간을 개통한다는 게 업체 목표다. 지금은 도로가 안 막혀도 차로 4시간 30분가량 걸리는 거리를 그때쯤이면 항상 2시간 남짓 만에 오갈 수 있게 된다.
시간 절약만이 아니다. 피터 부티지지 미국 교통부 장관은 당일 성명을 통해 △수천 개의 일자리 △더 나은 경제적 기회 △교통 체증 감소 △대기오염 완화 등도 기대 효과로 거론했다.
고속철로 불리려면 적어도 시속 250㎞ 정도로는 질주해 줘야 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20개 넘는 나라가 보유한 고속철이 미국에는 아직 없다. 수도 워싱턴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을 잇는 735㎞ 길이 구간 암트랙(Amtrak·미국철도여객공사) 열차 어셀러의 속도가 그나마 빠르지만, 시속 241㎞ 수준이다. 낡은 선로를 느린 화물 열차와 공유하느라 대부분 구간에서 그마저도 내지 못하기 일쑤다.
지금껏 수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여론조사업체 레드필드앤드윌턴스트래티지스에 의뢰해 6월 11일부터 이틀간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더니 응답자의 60%가 신규 고속철 건설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 비율은 7%에 불과했다.
비행기를 타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불만이 많았다. 미국 지식 공유 플랫폼 쿼라에 닉네임 ‘데미안’이 올린 글을 보니, 차로 가기에는 다소 먼 800㎞ 거리를 비행기로 갈 때 얼마나 걸리는지가 도심 간 이동을 전제로 계산돼 있었다. 공항 왕복, 탑승 수속, 보안 검색대 통과, 대기, 이·착륙, 수하물 회수 등에 걸리는 시간을 셈해 보니 비행 시간(시속 900㎞) 자체는 54분밖에 안 됐으나, 총소요시간은 5시간 4분이나 됐다.
이에 비해 시속 300㎞ 고속철로 동일 구간을 이동한다고 가정하면 열차 탑승 시간은 2시간 40분으로 더 길어도,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걸리는 총시간을 따질 경우 3시간 35분으로 비행기보다 훨씬 짧았다. 교통편이 지연되거나 짐을 분실할지 모른다는 염려도 열차가 적다고 데미안은 부연했다. 미국 정부기관에서 협상가로 일하는 제러미는 본보에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할 때는 고속철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속철의 진짜 경쟁 상대는 자동차라는 게 전문가와 업계의 인식이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통·물류 프로그램 책임자인 이언 새비지 교수는 뉴스위크에 “미국인의 고속철 지지는 갈수록 포화 상태에 가까워지는 고속도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스티븐 가드너 암트랙 최고경영자(CEO)도 미국 경제 매체 포천 인터뷰에서 “자동차 시장이 우리의 최우선 경쟁 시장”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수요가 있는데도 미국에서 고속철 공급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투자금 환수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를 정도로 막대한 구축 비용 때문이다. 고성능 열차만 갖춘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열차가 속도를 내려면 철로가 얼마간 반듯할 필요가 있다. 전용 철로가 필요한 이유다. 게다가 고속철은 전기로 움직인다. 지난해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아시아·유럽 철도의 전철화 비율은 60%를 웃돈다. 가장 비중이 높은 한국은 85%다. 반면 북미는 5%에도 못 미친다. 전력 공급 시스템 구비까지도 갈 길이 멀다.
여간한 수요로는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수익 구조인 만큼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다. 모든 고속철도망은 각국 정부가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결과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애초 여건이 정부가 적극 나서기가 까다롭다. 우선 국토가 방대하고 인구 밀도가 낮다. 고속철로 연결하기에 수요가 충분한 구간이 드물다. 아무리 빠른 열차로도 10시간 가까이 걸리는 장거리 여행은 항공기의 대안이 없다.
이미 굳어진 ‘자동차·항공기’ 연결 패턴의 관성도 강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부터 미국에서 자동차가 다진 입지는 탄탄하다. 승전에 기여한 제대 군인에게 보상으로 지급한 주택 보조금이 도시 주변에 중산층 교외를 형성했고, 이런 도시 구조는 자동차 급증과 차 중심 교통망으로 이어졌다.
화물 운송 위주 철도 인프라(기반시설)와 제도도 걸림돌이다. 미국 철로의 71%가 화물 철도 회사 소유다. 그러다 보니 속도가 빠른 여객 열차에 우선 통행권을 주는 연방 철도법이 무시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화물 열차가 지나가도록 여객 열차가 대기하는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 차체를 한계 이상 가볍게 만들지 못하는 것도 선로를 공유하는 무거운 화물 열차와의 충돌 상황을 감안해 당국이 설정한 내구성 규제 기준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견과 이해 충돌이 화물 열차와 상대할 때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미국 보수 싱크탱크들은 기본적으로 고속철 보조금에 연방 예산이 쓰이는 것을 반대한다. 데이비드 디치 헤리티지재단 선임정책분석가는 지난 1월 재단 홈페이지 글에서 “매몰 비용 때문에 정치인들이 끝을 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지만 워싱턴은 완성되지 못할 철도 사업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납세자를 속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당장 긴요하지 않은 곳에 세금을 너무 많이 쓴다는 얘기다. 농지 파괴는 안 된다는 토지 소유주의 저항, 경쟁자인 항공사의 로비도 고속철 측에는 만만치 않은 장애 요소다.
그러나 전반적 분위기는 고속철에 희망적이다. 앤디 바이퍼드 암트랙 고속철 부문 수석 부사장은 6월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 “미국이 ‘고속철 클럽’ 가입 호기를 맞았다”며 “노선 하나를 성공시키면 대중의 요구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돌파구는 ‘고속철 맞춤형 대도시 조합’ 발굴이다. 바이퍼드 부사장은 “200~600마일(322~966㎞) 떨어진 적당한 거리의 미국 도시들을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이어 주는 게 현실적 미래”라고 했다.
댈러스와 휴스턴이 바이퍼드가 꼽은 모범적 ‘도시 짝’이다. 올 4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미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두 도시 간 고속철로 ‘일본 신칸센’ 도입을 합의했다. 노선 길이 380㎞인 이 사업은 차로 3시간 30분 걸리는 도시 간 이동 시간을 90분으로 단축할 수 있다.
막히는 도로와 함께 고속철 사업을 추동하는 강력한 명분이 기후변화다. 암트랙에 따르면 워싱턴과 뉴욕 사이의 비행은 열차 이동보다 1인당 온실가스를 최대 3.7배 더 많이 배출한다. 자동차는 5.8배까지 늘어난다. 항공기의 탄소 배출과 이로 인한 기후변화가 난기류를 악화시켜 항공 교통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는 분석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기약 없이 붙잡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국 고속철 구상을 재출발시킨 것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의지였다. 부티지지 장관이 2021년 취임과 더불어 일찌감치 “미국에 고속철 시대를 열겠다”고 천명했고, 연방 상원의원 시절부터 기차를 꼬박꼬박 타 ‘암트랙 조’로 통하던 바이든 대통령은 그해 초당적으로 통과시킨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 법안’에 철도 현대화 예산으로 660억 달러(약 90조 원)를 편성했다.
이렇게 자금 조달에 숨통이 트이며 다시 활기를 찾은 미국의 굵직한 고속철 프로젝트는 대략 5개다. 가장 적극적인 주는 캘리포니아다. 브라이트라인 웨스트가 공사를 맡은 LA~라스베이거스 구간 외에 주정부 주도로 LA~샌프란시스코 구간을 최고 시속 354㎞ 열차로 2030년대 중반까지 연결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민간업체인 텍사스 센트럴이 암트랙과 협력해 짓는 텍사스 고속철은 댈러스~휴스턴 구간을 시속 322㎞ 열차로 2026년까지 잇는다는 게 애초 설계다. 암트랙은 워싱턴~보스턴 구간에 연내 시속 257㎞로 달리는 새 어셀러를 선보일 예정이고, 캐나다 밴쿠버와 미국 시애틀·포틀랜드를 2035년까지 연결하는 국가 간 고속철 건설 계획도 검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