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나라' 배우 유재명이 세상을 떠난 동료 故 이선균을 떠올리며 그의 연기력을 주목해달라고 당부했다.
지난 8일 유재명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본지와 만나 영화 '행복의 나라'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행복의 나라'는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든 변호사 정인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조정석 이선균 유재명이 각각 박태주를 살리기 위해 재판에 뛰어든 변호사 정인후와 명령에 의해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는 정보부장 수행 비서관 박태주, 그리고 권력을 위해 재판을 움직이는 합수부장 전상두로 분했다.
이날 유재명은 '행복의 나라' 대본을 한 차례 거절했던 이유를 고백했다. 첫 대본에서 그가 제안받은 전상두의 이미지를 그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유재명은 "제가 최초로 대본을 받았을 땐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실존하는 인물이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유는 작품 속에서 제가 해야 할 인물에게 안개가 있다고 생각했다. 전상두를 빌드업시키기엔 극도로 절제된 서사와 분량이 저라는 배우가 이 인물을 표현하기에 역부족이라고 느꼈다"라고 돌아봤다.
그럼에도 그가 '행복의 나라'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유재명은 "꼭 거절한 작품은 되새기는 습관이 있다. 제가 예의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이태원 클라쓰' 감독님에게도 다시 전화를 드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연락을 드렸다. 안개 속의 느낌이 가시화되면서 해보자고 생각했다. 작품을 하면서 의문점을 찾아갔다. 어려워서 작품을 거절하진 않지만 확신이 없을 때 고개를 돌린다.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있어서 거절한 건 아니다. 과거 김영삼 대통령을 연기한 적도 있다. 실존 인물이 모델이라는 건 선입견을 줄 수 있다. 찾아가는 과정이 어려웠으나 재밌었다"라고 설명했다.
한정된 분량에 엄청난 이미지, 그에게 포진된 역할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인물을 잘 표현하고 싶은 강력한 욕망이 있었다. "표현을 하면 할수록 지는 싸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에게 당면한 과제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유재명은 "제가 왜 한다고 했지. 무엇을 얻을까. 해도 손해 안 해도 손해라고 생각했지만 배우로 태어났기에 도전한다"라고 소신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배우는 어쩔 수 없이 인물을 정당화해야 한다. 나라를 지킨다는 이유로 조국에 헌신하고 있다. 밖에서의 인물은 삐뚤어진 신념으로 보이겠지만 저는 정당화를 해야 했다"라면서 고충을 토로했다.
'행복의 나라'는 실제 역사 사건을 배경으로 다루면서 개인이 삶과 죽음, 신념, 조국의 딜레마에 빠진다. 유재명은 자신이 분한 인물이 시대의 상징이라고 바라봤다. 그는 "제가 실제의 시대를 어떻게 하면 인물을 해치지 않고 좋은 연결고리가 될까. 딜레마에 빠진 인간을 짓누르는 상징이다. 삐딱한 고개, 우두커니 모색하는 오만함, 다정하면서도 오만한 신념. 적극적으로 인물을 표현하기보단 주어진 것에 집중했다"라고 했다.
"'남산의 부장' '서울의 봄' '행복의 나라' 등 최근 그 시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작품이 연이어 나오면서 마치 같은 세계관에 있는 느낌을 줄 정도입니다. 창작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죠. 다 다르고 미학적으로 개성이 부각되는 작품들입니다. 비교보다는 각 작품의 매력을 같이 고민해 본다면 어떨까요. 연기적으로도 각각의 질감으로 승부를 봤습니다. '서울의 봄'이 너무 잘됐지만 지금은 저희 영화를 있는 그대로 잘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작품에서 전두환을 표현하기 위해 싱크로율 차원에서 삭발까지 감행했다. 실존 인물이 모티브기 때문에 싱크로율을 맞추기 위한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테스트를 하면서 머리를 밀면서 라인을 만들었고 지금의 비주얼이 완성됐다. 실제로 유재명은 전두환의 성대모사를 하거나 영상을 찾아보기도 했으나 결국 최소한의 것으로 인물을 만들고자 했고 외적인 동질감 외에 추가적인 장치를 넣지 않았다.
올해 상반기부터 지금까지 드라마 '삼식이 삼촌' '노 웨이 아웃' 그리고 '행복의 나라'까지 열일에 매진 중이다. 그 역시 자신이 열일 배우임을 인정했다. 유재명은 "한 번도 쉰 적 없이 열일 배우라는 타이틀로 작업했다. 우연치 않게 작품들이 같은 시기에 공개되면서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 영화, 이 시대, 이 세력을 상징하는 인물을 하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배우는 작품으로 존재한다. 영화가 잘 되길 바라는 기대와 마음이 있다"라고 길게 설명했다.
故 이선균에 대한 언급도 나왔다. 유재명은 "앞서 '노 웨이 아웃'이나 다른 작품에서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만 개인적으로 이선균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으면 좋겠다. (제 감정이)부각되는 것보다 이선균 배우에 대한 포커스, 연기에 대해 많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안타깝고 그리운 감정은 충분히 설명됐다.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면서도 "정말 좋은 배우였다. 이번 작품이 그의 연기를 바라보는 창구가 됐으면 한다. 살아있었다면 나나 조정석에게 '연기가 너무 좋았다'고 할 것 같다"라고 그리움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