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지하철에는 ‘펜싱 선수’가 등장한다?

입력
2024.08.0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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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훈 산문집 '이번 역은 요절복통 지하세계입니다'

편집자주

시집 한 권을 읽고 단 한 문장이라도 가슴에 닿으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흔하지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 그 기분 좋은 성공을 나누려 씁니다. '생각을 여는 글귀'에서는 문학 기자의 마음을 울린 글귀를 격주로 소개합니다.

“펜싱 종주국인 프랑스 사람들이 비 오는 날 한국의 지하철 승강장에 온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한국의 펜싱 사랑이 대단하구나?’”

2024 프랑스 파리 올림픽 펜싱에서 두 개의 금메달과 한 개의 은메달을 따낸 한국의 저력은 어쩌면 이런 ‘펜싱 사랑’에서 왔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한국인의 일상에서 펜싱을 접하기란 어려운 일이라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리실 겁니다. 7년 차 부산 지하철 기관사인 이도훈 작가는 그러나 자신의 산문집 ‘이번 역은 요절복통 지하세계입니다’에서 이렇게 단언합니다. “비 오는 날 지하구간의 역 승강장에는 전문 스포츠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바로 펜싱 선수들이다.”

이 작가는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가장한 펜싱용 검을 든 승객들이 이를 닫히는 지하철 문 사이로 찔러 넣는다고 전합니다.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지하철 문에 공격을 내지르는 승객들로 인해 기관사로서는 출입문을 다시 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를 가리켜 펜싱 종주국인 프랑스 사람도 놀라게 할 ‘쟈철(지하철)에페’라면서 이 작가는 “국제펜싱연맹에서는 국제대회를 개최할 때 기존의 플뢰레, 에페, 사브르 세 종목에 더불어 ‘쟈철에페’ 종목도 추가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비 오는 날의 지하철의 축축한 공기와 퀴퀴한 냄새, 젖은 우산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지수를 치솟게 합니다. 지하철 기관사들 역시 이런 펜싱 선수들의 출몰과 함께 젖은 철길에 쉽게 미끄러지는 ‘고물 지하철’을 운전해야 하는 여러 고충 탓에 비가 오는 날을 싫어한다고 하네요. 그렇지만 기관사들은 날씨에 관계없이 매일 약 3,744차례 지하철 출입문을 여닫으며 정시 운행을 사수하려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이 작가는 전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인생에서 기다리는 대부분의 것들이 더디 오거나 결국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지하철은 매일 정확히 와서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나를 늦지 않게 데려다줄 것이라고” 믿는 승객들을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서.”

눈앞에서 닫힌 지하철 문 앞에서 아쉬워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죠. 지하철 펜싱 선수들이 오죽 급한 일이 있었으면 우산을 찔러 넣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배가 아프고 급똥 지옥이 펼쳐져도” 어김없이 지하철 맨 앞 칸을 꿋꿋이 지키는 이 작가를 비롯한 기관사들을 위해서라도 지하철 펜싱은 참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지하철이 도착해 “늘 그랬듯 단 하루도 멈추지 않고 1년을 부지런히 달려”서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줄 겁니다.

전혼잎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