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를 필사하며 깨달은 것

입력
2024.08.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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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소설 '백의 그림자'

편집자주

치열한 경쟁을 버텨내는 청년들에게 문학도 하나의 쉼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 중 빛나는 하나를 골라내기란 어렵지요. 소설집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으로 제55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송지현 작가가 청년들의 '자연스러운 독서 자세 추구'를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한국일보>를 통해 책을 추천합니다.

대학교 학부생 때부터 좀체 필사를 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굳이 남의 글을 따라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글이 빨리 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독자이며 작가를 꿈꾸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누워서 황정은 작가의 소설을 다 읽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여운에 잠겨 뒹굴뒹굴하다가 깨닫고 만 것이다. ‘어머,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글은 못 쓰겠네!’

약간의 절망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무슨 정신에선지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책을 필사해 보자. 그럼 내가 쓰는 것 같은 느낌은 받을 수 있겠지.’

당장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황 작가의 소설을 그대로 따라서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빈 커서가 문장을 완성할 때, 마치 자신이 쓰는 것처럼 느껴지는 쾌감이 있었다. ‘이래서 선생님들이 필사를 하라고 했구나.’ 당연히 아니었다. 선생님들이 문장의 리듬감이나 연결을 느껴보라고 숙제로 필사를 내주었다는 것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여러 작가의 작품을 필사하며 은밀히 내가 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왔다. 그러니 황 작가의 작품은 그저 좋을 뿐 아니라 필사의 중요성을 알려준 선생님이기도 하다. 황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을 묻는다면, 그건 정말 하나를 고르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백의 그림자’를 소개하려는 것은 이 작품이 어떤 기점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백의 그림자’는 ‘은교씨’와 ‘무재씨’의 사랑을 다룬 연애소설이다. 또 일어서는 그림자가 존재하는 환상소설이기도 하다. 동시에 사라진 것들의 빈자리를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그것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윤리적인 소설이다. 그 윤리는 우리가 오래도록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 그러니까 ‘가마’와 ‘슬럼’이라는 단어의 정의라거나 나아가서는 철거될 건물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얽히고 또 얽힌 부분의 티가 나지 않은 채로 이리저리 뒤섞여있는 소설들이 언제나 좋다. 소설은 삶을 닮아야 한다는 무조건적 명령을 믿고, 이 소설은 정말이지 우리의 삶과 닮았으므로. “마트료시카 속엔 언제까지나 마트료시카, 실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중략)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이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황 작가가 그려낸 세계는 공허하지 않다. 어둠 속을 걸어가며 시작한 그들의 대화는 비록 어둠 속에서 끝나지만, 작가는 기어코 누군가가 그들을 찾아줄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공허한 삶 속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몇몇의 글을 빛처럼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송지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