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금기’인 왕실을 겨냥한 대가는 컸다. 지난해 태국 총선에서 군주제 개혁 요구를 앞세워 돌풍을 일으킨 개혁 성향 정당, 전진당(MFP)이 결국 강제 해산됐다. 그러나 당이 2030세대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는 만큼, 분노한 청년들이 거센 반발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7일 태국 방콕포스트 등에 따르면 태국 헌법재판소는 이날 제1당 전진당이 정치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뒤 정당 해산 명령을 내렸다. 피타 림짜른랏(44) 전 대표 등 당 지도부 11명의 정치 활동도 10년간 금지했다.
전진당이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당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인 ‘왕실모독죄 폐지’ 공약에 있다. 입헌군주제인 태국에서 왕실은 신성시된다. 왕실모독죄(형법 112조)는 왕실 구성원 또는 왕가 업적을 모독하거나 부정적 묘사를 하는 경우, 최고 징역 15년형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자의적 해석이 가능해 반체제 인사 탄압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비판도 받는 조항이다.
지난해 5월 전진당은 총선을 앞두고 해당 법 개정을 공약으로 내세워 젊은 층의 전폭적 지지를 얻었고, 최다 의석을 차지했다. 다만 보수·왕당파의 반대로 총리 후보였던 피타 대표가 의회에서 과반표를 얻지 못해 집권에는 실패했다. 이례적인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전진당의 ‘수난’은 이어졌다. 태국 헌재는 올해 1월 전진당의 왕실모독죄 개정 움직임에 대해 “국가 통치 시스템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한 달 뒤에는 선거관리위원회가 보수 진영 청원을 받아들여 헌재에 전진당 해산 심판을 청구한 탓에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당은 왕실모독죄 개정 추진에 체제 전복 의도는 없었으며, 선관위의 정당 해산 심판 청구에도 절차적 하자가 있다고 맞섰다. 하지만 결국 헌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헌재 선고 후 전진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이 세상에는 파괴할 수도, 파괴될 수도 없는 것이 있다. (당은) 멈추지 않고 계속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단 당 소속 하원의원 143명 중 상당수는 의석이 없는 군소정당으로 당적을 옮겨 정치 활동을 이어갈 전망이다.
실질적인 당 지도자인 피타 전 대표는 최근 AP통신 인터뷰에서 “(해산이 되더라도) 단지 개인이나 당의 미래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 반발은 불가피해 보인다. 지난 5월 태국 의회 산하 국책연구소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전진당은 35.7%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전체 정당 가운데 1위였다. 연립정부를 이끄는 집권 여당이 11.2%에 그친 것과 대비된다. 피타 전 대표를 차기 총리로 지지한다는 의견도 46.9%에 달했다.
당 지지자들이 거리로 뛰쳐나갈 가능성도 있다. 기득권 세력이 총선에서 전진당을 제1당으로 선택한 민심을 무시하고 정부를 구성한 데 이어, 이번에는 당 해산까지 이끌어냈다는 사실에 거센 분노가 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날 태국 국민들은 SNS에 “정당 해산 권리는 국민에게 있다”며 헌재 결정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앞서 전진당의 전신인 미래전진당(FFP)이 군주제 개혁을 요구했다가 2020년 헌재 선고로 해산된 사건은 같은 해 태국 사회를 뒤흔든 ‘세 손가락 시위’의 기폭제가 됐다. 올해 똑같은 수순을 밟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