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빈곤 퇴치 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무함마드 유누스(84)가 전례 없는 정국 혼란에 빠진 조국을 당분간 이끌게 됐다. 불공정에 대한 분노로 시작된 반(反)정부 시위 격화로 물러난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최대 정적' 유누스는 이제 3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유혈 사태를 수습하는 한편, 권위주의 통치로 얼룩진 나라를 재정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
7일 AP통신 등 외신과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방글라데시 대통령실은 이날 유누스가 과도정부 수장 격인 최고 고문을 맡게 됐다고 밝혔다. 3주 동안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대학생들이 그에게 '과도정부 수반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고, 전날 모하메드 샤하부딘 대통령도 군부, 학생 지도자 등과 6시간가량 회의를 한 뒤 이를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유누스는 방글라데시 경제학자이자 빈곤 퇴치 운동가다. 가난한 이에게 소액을 무담보로 빌려주는 '그라민은행'을 1983년 설립, 담보 자산이 없어 대출은 꿈도 못 꾸던 농촌 빈민과 여성들의 빈곤 탈출을 이끌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국제사회는 그를 '무담보소액대출(마이크로크레디트)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곧이어 정권과의 불화가 시작됐다. 2007년 여당에 맞선 정당 창당을 시도한 탓이다. 2009년 1월 출범한 하시나 정권은 유누스를 겨냥한 수사를 본격화했고, 2년 뒤 그라민은행 총재직에서 그를 해임했다. 올해 1월 유누스는 이동통신사 그라민텔레콤과 관련한 노동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을 선고받은 데 이어, 6월에는 횡령 혐의로도 기소됐다. 15년간 집권한 하시나 총리 임기 동안 유누스가 직면한 소송 건수만 100건 이상이라고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유누스는 "정치 탄압"이라며 맞서 왔다.
올해 3월부터 프랑스 파리에 체류해 온 유누스 앞에 놓인 과제는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험난하다. 귀국 즉시 '유혈사태 수습'과 '질서 회복'이라는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샤하부딘 대통령이 전날 의회를 해산한 만큼, 90일 안에 실시될 총선도 관리해야 한다. 방글라데시 싱크탱크 정책대화센터(CPD) 파흐디마 카툰 연구원은 "경찰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폭력·파괴 행위로 상당한 재산 피해도 발생했다"며 "평화 회복이 과도정부의 최우선 과제"라고 미국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하시나 총리의 독재 흔적도 지우고, 정치 개혁도 추진해야 한다. 방글라데시 정치 전문가 알리 리아즈 미 일리노이주립대 교수는 "지난 15년간 하시나 정권이 모든 기관에 충성파를 투입한 결과, 부패가 만연해진 만큼 이를 해소해야 한다. 또 젊은이들의 정치적 열망을 충족시켜야 할 도전에도 직면해 있다"고 짚었다.
이런 가운데 로이터통신은 하시나 총리의 돌연 사임 배경에 대해 "군부가 시위대 유혈 진압을 거부하면서 총리에게 항명했기 때문"이라고 이날 보도했다. 앞서 방글라데시 정부는 지난 6월 공직의 30%를 독립유공자 자녀에게 할당하는 제도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했고, 지난달 중순부터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어졌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300여 명이 사망했으며, 하시나 총리는 5일 사임 의사를 밝힌 뒤 인도로 도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