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워싱턴 국방부 청사를 강타한 9.11 테러가 난 뒤, 미국은 대대적 보복을 선언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세계 각국에 "미국 편에 설 것인지, 테러집단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하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이후 미국은 테러를 저지른 알 카에다와 최대 지원세력으로 지목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최첨단 무기를 동원해 공격에 나섰다.
그해 10월 7일 미국이 아프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자, 세계 언론의 관심은 아프간 수도 카불의 탈레반 정권이 언제 백기를 드느냐에 쏠렸다. 이와 함께 카불이 함락되면 가장 먼저 현지에 기자를 보내, 기사를 내보내겠다는 경쟁이 시작됐다. 세계 주요 매체의 종군 기자와 취재 기자들이 아프간과 국경을 맞댄 파키스탄 페샤와르로 몰렸다. 이 대열에는 한국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카불이 함락되자마자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선을 넘은 한국 매체의 기자는 단 한 사람이었다. 물론 한국일보 기자였다. 금문도 포격(1958), 사이공 최후의 새벽(1975) 등 한국 언론의 전쟁 취재를 선도해온 선배 종군기자들의 전통을 이은 홍윤오 기자가 페샤와르에서 카불까지 이어지는 위험한 취재를 감행했다. 11월 17일 자 1신을 시작으로 홍 기자는 카불에 입성하기까지의 과정과 동료 외국 기자들의 잇따른 피살, 아프간 국경에서 접한 무인정찰기의 오폭 등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 순간들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홍 기자의 취재는 서구 언론이 제공하는 미국 중심의 기사에서 벗어나, 중립적 시각으로 전쟁 상황을 보도했다는 점에서도 호평을 얻었다. 홍 기자도 취재기를 엮은 '아프간 블루스'에서 같은 취지로 설명했다. "그네들 말로는 9.11에 대한 응징 보복이자 테러의 뿌리를 뽑기 위한 명분 있는 전쟁이라고 했지만 제3자의 시각에서는 일방적인 폭탄 세례였다. 명색이 전쟁이라면 서로 치고, 받고, 밀고 당기는 최소한의 힘겨루기가 있어야지, 이 싸움은 그런 양상이 아니었다. 덩치 좋은 대학생이 ‘못된 짓 했다’며 초등학생을 마구 두들겨 패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홍 기자는 아프간 취재 이듬해인 2002년 대선 당시 정몽준 후보의 국민통합21에 합류해 정계로 진출했으며 국회 홍보기획관, 한국콘텐츠진흥원 감사 등을 지내고 지난 4월 치러진 총선에서 '수원 을'에 국민의힘 후보로 출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