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말로 누릴 권리

입력
2024.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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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이 올림픽 소식으로 뜨겁다. 경기 결과는 곧 국격이라는 명분으로, 시차도 넘고 더위도 이겨낸다. 스포츠의 힘은 놀랍다. 그런데 올림픽에서 보여주고 싶은 국격의 관점은 나라마다 다르다. 국민 스포츠란 금메달을 따서 국기와 애국가가 방송을 탈 수 있는 종목인가, 혹은 국민 다수가 두루 참여할 수 있는 종목인가? 스포츠 정책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은 '생활체육의 보편화'와, '소수 재능자의 선별과 육성'으로 나뉘는 듯하다.

스포츠도 스포츠 정책도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서 그 답을 찾는 일은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런데 이런 논쟁은 국가의 여러 정책에서 같은 양상인데, 언어 정책도 그러하다. 공적 언어의 수혜자가 곧 사회 구성원 모두라고 보는 공공성과, 모두가 평등할 수는 없다는 관점으로 나뉘는 것이다. '공공언어'는 전자에서 나온다. 공공언어란 사회 구성원이 다 같이 보고 듣고 읽는 것을 전제로 사용하는 말과 글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각종 공문서는 물론이고, 대중 매체, 길거리에 걸린 현수막과 간판,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각종 계약서, 약관, 제품 사용 설명서,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와 언론 등 모든 공적 소통이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공공언어는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라고 법으로 규정돼 있다.

공공성이 왜곡된 것을 '과시적 공공성'이라고 한다. 이것은 국가나 국민의 권한을 위임한 특정 대표가 일반인들 앞에 과시하는 모양새를 일컫는다. 한때 '과시적 공공성'을 보편적 현상으로 여기던 때도 있었다. 중세 봉건제에서는 높은 지위를 지닌 사람이 고귀한 행동과 엄격한 행위 양식으로 지위를 과시하곤 했는데, 이런 공공성은 자신이 신적으로 군림하기 위한 포장이었다.

과시적 공공성의 예시를 우리 언어생활에서 찾아보자면 100여 년 전 이두가 있다. 이두는 고대에 금석문에 쓰인 것뿐만 아니라, 19세기까지 공사 문서와 한문 번역에 사용됐다. 조선 숙종의 칙령 이후, 한글로 된 문서는 공문서로 효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모든 공문서는 국문(한글)으로 표기하라'는 고종의 칙령 덕분에 한글은 공문서의 언어가 될 수 있었지만, 결국 한글을 지금의 지위로 세운 이들은 20세기 초, 민족의식과 실용의식이 높아진 일반인들이다. 그때 말무리가 과시적 공공성을 당연하게 여겼다면, 지금 우리는 이두로 된 문서 한 장을 들고서 뜻이라도 알아보려고 애타는 종종걸음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시적 공공성을 멀리서 찾을 것인가? 불과 30년 전만 해도 한국 신문의 전형은 어려운 말과 한자가 군데군데 섞인, 세로쓰기였다. 독자가 학교에서 한글 가로쓰기로 된 교과서를 배웠음을 모르지 않았을 터지만, 여전히 그러한 형태를 주장했던 신문은 어쩌면 과시적 공공성을 최소한의 권위로 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들은 결국 읽기에 쉬운 신문을 선택했다. 오늘날 신문 지면의 모습은 변화된 독자를 알아본 신문사가 더 보기 좋고 읽기 쉽게 만들어 낸 결과다. 헌법에는 행복 추구권, 평등권, 보건권, 소비자와 근로자의 권리 등이 명시돼 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알 권리가 있다. 그러나 알 권리란 사용자가 자신을 주체로 인식할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힘이란 점을 역사는 증명한다.


이미향 영남대 글로벌교육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