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직업이 어디 가서 자랑할 직업도 아니고···."
무당 이홍조가 최근 종방한 SBS '신들린 연애'에서 여성 출연자와 데이트할 때 이렇게 말하자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또 다른 무당 함수현은 "무당이라고 하면 (상대가) 살짝 멈칫한다"며 '연애를 하는 것도, 결혼해서 애를 갖는 것도 힘들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신들린 연애'는 무당을 비롯해 사주와 타로로 타인의 운명을 봐주는 게 직업인 8명의 젊은 남녀가 출연해 짝을 찾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사랑과 결혼이 쉽지 않은 젊은 무속인들의 모습은 경제적 부담으로 연애와 결혼 등을 포기한 'n포 세대'와 묘하게 겹친다. 김교석 방송평론가는 "점술가들의 연애라는 프로그램 콘셉트는 언뜻 기이하고 자극적"이라면서 "다른 사람의 운명을 내다본다는 이들조차 자기감정과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모습이 그려지면서 입소문을 타고 시청자의 공감을 끌어냈다"고 평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회경제적 불안이 커지면서 '불안이' 캐릭터를 앞세운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2'가 836만 관객(7월 31일 집계)을 극장으로 불러 모은 것과 비슷한 인기 이유다.
무속인들의 연애 프로그램 출연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무속인들은 출연을 혼자 결정할 수 없었다. 각자 모시는 '신령'에게 물어보고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신들린 연애' 제작을 총괄한 김재원 SBS 시사교양본부 책임프로듀서는 31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어떤 무속인과 어렵게 연락이 닿아 출연을 요청하니 '산에 올라가서 (신령께) 물어보고 와야 한다'고 해 기다렸는데 '아직 때가 아니다'란 답을 받았다며 출연을 고사한 분이 있다"며 "산에 들어간다고 한 뒤 연락이 끊긴 분도 많았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 등을 통해 약 1,500명의 점술가에게 연락했다. 전과 조회, 학교 생활기록부 제출 등에 동의한 100명을 면접에서 추려 8명을 출연자로 결정했다. 방송에 나온 무당 3명은 모두 모시는 신령의 허락을 받고 나왔다고 한다.
'신들린 연애'에 이렇게 어렵게 출연한 무당들은 정작 모두 '운명'을 거슬렀다. 상대 출연자의 생년월일을 보고 점사(신령의 뜻)에 따라 먼저 택했던 '운명의 짝'을 포기하고 마음이 가는 상대를 최종 선택한 것. 사주에 집착했던 역술가 출연자는 혼란에 빠져 중도에 하차하기도 했다. "신령님 뜻 다 떠나 인간의 마음으로 선택할 거다" "지금 선택 또한 내 운명" 등이라고 말한 '쿨한' 젊은 점술가들에게 또래 시청자는 호응했다. 정해진 운명을 거슬러 짝을 찾은 젊은 점술가들 중엔 방송 후 실제 연인 사이가 된 커플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웨이브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을 찾아본 구독자 10명 중 6명(62.1%)은 2030세대였다. 전 연령대 TV 시청률은 2%대로 높지 않았지만, 방송 6주 내내 지상파 통틀어 동시간대 20~49세 시청률은 가장 높았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운명과 반대되는 길을 선택하고 그렇게 성장하는 점술가들을 보면서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하는 젊은 시청자들이 대리만족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관심에 힘입어 SBS는 31일 "'신들린 연애' 시즌2 제작을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신들린 연애'처럼 정해진 운명에 저항해 '내가 원하는 나'를 찾는 과정을 다룬 콘텐츠들이 요즘 인기다. 좋아하던 가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운명을 되돌린 팬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흥행이 대표적이다. '탈운명' 프로그램 제작은 장르를 뛰어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웨이브 다큐멘터리 '모든 패밀리'는 레즈비언 부부가 아이를 낳아 기르며 벌어지는 희로애락을 가볍지 않게 다루며 조용히 반향을 낳고 있다.
이런 흐름은 2024 프랑스 파리 올림픽과 맞물려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응원인 '알빠임?('네가 누군지 내가 알 바가 아니다'란 뜻)' 유행과도 맞닿아 있다. SNS엔 '노르웨이 이기면 되는 거 아님? 여자 핸드볼 세계 2위? 알빠임?' 등의 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아무리 상대 팀의 전력(운명)이 강해도 주눅 들지 말고 한국팀이 할 수 있는 경기를 치르는 게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탈운명'과 '알빠임?'의 유행은 데이터만으로 미래를 단정적으로 예측해 가능성을 축소하는 인공지능(AI)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란 분석도 있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대중문화 속 '탈운명'과 '알빠임?' 유행은 주어진 데이터 혹은 운명으로 축소되는 내 잠재성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청년 세대 욕망의 반영"이라고 현상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