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법안 처리를 막았다. 민주당이 반대하지만 않으면 간첩법 개정안이 통과될 것이다.”(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형법의 간첩죄 조항에 '민주당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최근 '정보사 블랙요원 정보 유출' 의혹이 발생한 가운데, 간첩죄 처벌의 사각지대에 대한 책임을 민주당으로 돌린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등 야권 의원들은 발끈했다. 사실이 아닌 말로 야권을 호도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를 "팩트도 틀리고, 팩트 확인도 안 하고 했던 그 얘기는 철저하게 남 탓과 본질 흐리기"라고 지적했다.
한 대표의 주장과 야권의 반박, 누구의 말이 맞을까. 이를 확인코자 본보는 31일 간첩죄 조항을 담은 형법 개정안에 대한 21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회의록을 들여다봤다.
회의록에 따르면, 형법상 간첩죄 적용 대상을 '적국'에서 '외국'으로 확대하는 논의는 소위원회에서 총 세 차례 다뤄졌다. 2023년 9월 소위에서 소병철(민주당) 당시 소위원장이 "법무부에서 재수정안을 냈으니 좀 더 검토해서 논의를 계속하자"고 한 게 마지막이었고, 이후 회기 종료로 인해 발의된 관련 법안은 모두 폐기됐다. 그리고, 회의록에서는 민주당이 아닌 법원행정처가 다른 법과의 충돌, 과잉 처벌 등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반대 입장을 견지해나갔다.
법원행정처는 첫 소위에서부터 반대를 분명히 했다. 박영재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은 "외국을 상대로 하는 탐지·수집·누설은 군사기밀보호법에 의해 규율되고 있는데, 어떤 쪽에 규율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이 있어야 한다"며 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군사기밀보호법과의 충돌을 우려한 것이다.
다음 회의에서도 이 같은 입장은 계속 유지됐다. 박 당시 차장은 "'외국' 간첩행위 처벌보다 군사기밀보호법의 법정형이 경해 법체계상 검토가 필요하다"며 "우방국, 동맹국에 제공할 수 있는 정보와 적국, 준적국에 제공할 수 있는 정보 종류에 차이가 있는데도 일률적으로 높은 법정형으로 처벌하는 것이 타당한지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엔 형평성과 처벌의 모호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물론 당시 민주당 법사위원들도 법원행정처의 이 같은 입장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개정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판사 출신의 이탄희 의원은 "군사기밀보호법이랑 다 같이 놓고 심의를 해 체계를 다듬어야 한다"고 했고, 박용진 의원도 "간첩이라고 단순하게 편의적으로 하면 더 많은 구멍을 놓칠 수 있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국민의힘 법사위원인 검사 출신 유상범 의원 역시 법무부 수정안에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마지막 회의 자리에서 '외국'에 대한 국가기밀의 범위를 한정하는 내용이 담긴 법무부안에 "외국에 가는(유출되는) 것(기밀)이 그(적국)보다 범위가 좁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이해 못 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결국 여당 간사인 정점식 국민의힘 의원이 "군사기밀 보호법 등 개정안이 발의되거나 준비되고 있으니, 그 부분까지 같이 검토하자"고 제안했고, 소위원장이던 소 의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논의가 멈춰섰다.
이 같은 회의록 등을 근거로 야당 의원들은 당시 상황을 복기하며 한 대표를 비판하고 나섰다. 소위에 참석했던 박주민 의원은 페이스북에 "법원행정처와 법무부 간 합의안 마련과 이견 조율을 위해 심사가 진행됐고, 국민의힘 의원 또한 개정안의 우려점을 개진한 바 있다"며 "'민주당이 제동을 걸어 무산됐다'고 하기엔 자당 의원들을 너무 무시하신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은정 조국혁신당 의원도 "간첩법 개정안에 제동을 건 것은 민주당이 아니라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었던 박영재 대법관 후보자였다"고 했다.
간첩법은 현재 22대 국회에서 다시 논의를 기다리고 있다. 국민의힘에서는 주호영 국회 부의장이, 민주당에서는 장경태 의원과 위성락, 박선원 의원이 각각 21대 국회에서 논의된 것과 유사한 법안을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