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 쨍한 겨울이 벌써 그리워지는 나날입니다. 편집국에 쌓여 있는 신간 무더기 속에서 제 눈길을 잡아끄는 책이 있었으니, 바로 일러스트레이터 이다 작가의 '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입니다. 제 마음은 이미 표지 속 설원을 달리는 빨간 기차에 올라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멈칫했습니다. '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어언… 종군 일지인가.' 참고로 대한민국 외교부는 러시아 전역에 여행 금지 등 특별여행주의보를 발령했습니다.
책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러시아 월드컵이 열린 해인 2018년 3,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28㎞를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7개 도시를 누빈 총 29일간의 여정이 담겨 있는데요. 작가는 마치 카메라가 없던 시절처럼,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을 손으로 그리고 씁니다. 검은색 플러스펜으로 이른바 '똥종이'에 솔직한 일상을 그린 '이다의 허접질'(2003) 시절부터 팬이었던 저로서는 변함없는 손글씨와 그림체가 무척이나 반갑더라고요.
책은 코로나19 팬데믹을 이겨내고, 전쟁의 와중에도 출간됐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러시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좀체 웃지 않습니다.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 직원'이 어디에나 있었다죠. 하지만 작가는 "웃고 싶을 때만 웃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나라(…) 표정 관리, 눈인사, 스몰토크 없는 나라 러시아가 적성에 딱 맞다"고 포착합니다. 예술을 사랑하고, 고양이와 어린이를 아끼는 이들과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죠.
물론 열차 안에서 술에 취해 성적 불쾌감과 혐오를 유발하는 러시아 남성 여러 명과 마주칩니다. 민박집의 더없이 다정한 주인 할머니가 알고 보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였고요.
책은 총천연색을 띠고 있지만, 왠지 제게는 반전(反戰) 메시지로도 읽힙니다. 책을 읽으면 누구나 푸틴의 전쟁이 끝나는 그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싶어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