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발과 사리

입력
2024.08.08 04:30
23면

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서울 구경 왔다는 고향 친구랑 평양냉면 집에 갔다. "살얼음 김칫국에다 한 저 두 저 풀어 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이 궁금하다고 했다. 그의 멋진 표현에 취해 얼음 둥둥 떠 있는 육수를 죄다 마셨다. 찬 기운에 몸이 부르르 떨려서 냉큼 뜨거운 육수 한 잔을 마셨다. 냉면 집을 나서며 친구가 고백했다. 1929년 김소저가 읊은 평양냉면의 한 대목이었다고.

냉면의 원조는 평양냉면이다. 소고기 삶은 육수, 꿩 삶은 육수, 동치미 국물 모두 속을 뻥 뚫어준다. 밍밍하고 담백한 육수엔 메밀 섞인 면이 딱이다. 면발은 탱글탱글 쫄깃쫄깃한 느낌을 담아 [면빨]로 소리 내야 한다. "합성어 중에 표기상으론 사이시옷이 없더라도 관형격 기능을 지니는 사이시옷이 있어야 할 경우 된소리로 발음한다"는 표준발음법 때문이다. 보름달[보름딸], 밤공기[밤꽁기], 손재주[손째주], 눈동자[눈똥자] 등도 마찬가지다.

말발과 글발, 끗발 역시 [말빨], [글빨], [끋빨]로 발음해야 한다. 이때의 ‘-발’은 기세나 힘의 뜻을 안은 우리말이다. 약발, 사진발, 화장발, 조명발, 장비발처럼 효과의 뜻을 더하는 ‘-발’ 역시 [빨]로 소리 내야 한다.

친구가 속이야기를 털어놨다. 냉면 양이 좀 모자랐는데 ‘사리’ 때문에 고민했다고. 우리말로 먹고사는 친구 앞이라, 이리저리 머리만 굴리다 말도 안 꺼냈다고. 사리를 일본어 잔재로 오해한 탓이다. 사라(접시), 사라다(샐러드)와 생김새가 비슷해 그럴 만도 하다. 삶은 국수를 적당한 분량으로 동그랗게 감은 뭉치인 사리는 우리말이다.

사리는 동사 '사리다'에서 왔다. 국수뿐만 아니라 새끼, 실 등을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는 뜻이다. 냉면 사리, 라면 사리, 국수사리 등이 있다. 국수사리는 한 단어로 인정돼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올랐다. ‘사리다’는 뱀이 몸을 동그랗게 감는 행동을 이르기도 한다. 똬리 튼 뱀을 상상해 보시라. 국수를 말아놓은 모습과 많이 닮았다. 참, 우리 주변엔 몸을 '사리는' 이도 있다. 일이 터졌을 때 살살 피하며 몸을 아끼는 사람을 표현할 때 어울린다.

복달더위가 고개를 잔뜩 치켜들고 있다. 그래봤자, 이제 말복만 남았다. 입추도 지났다. 가을이라… 생각만 해도 머리부터 서늘해진다. 작가 정비석은 "가을은 사람의 생각을 깨끗하게 한다"고 했다. 휴가를 다녀온 사람도, 휴가를 앞둔 사람도 표정이 여유롭다. 여유로운 마음과 깨끗한 생각이 넘실대는, 새로운 계절이 눈앞이다.














노경아 교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