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지역 새마을금고에서 근무했던 50대 조모씨는 2019년 '밥 짓기' 업무를 거부한 뒤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 조씨가 담당했던 업무보다 훨씬 많은 30여 개 업무를 담당하게 됐고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고객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것도 모르냐"는 구박이 날아들었다. 마찰이 심해진 뒤로는 사무실 대신 '벽 금고'로 출근하게 됐다고 한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힘들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다"고 토로했던 조씨는 약 6년을 버텼지만 결국 올해 회사를 그만뒀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근로기준법 76조 2·3항)이 시행된 지 5년이 지났지만, 직장 구성원 간 괴롭힘 문제는 끊이지 않고 있다. 폭언과 따돌림, 신체적 괴롭힘은 물론, 육아휴직이나 연차 등 정해진 권리를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등 수법도 교묘해지고 있다. 특히 상시근로자 5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되는 근로기준법에 괴롭힘 방지 조항이 마련되면서 소규모 영세 사업장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노총이 노조원 1,6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하고 25일 발표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1.5%가 최근 3년 내에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휴가나 병가, 육아휴직, 출산전후 휴가처럼 노동자에게 당연히 보장된 제도를 못 쓰게 막는 괴롭힘을 당한 경우도 38.4%에 달했다. 상시근로자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은 사업주에게 직접 괴롭힘을 당했다는 응답률이 26%를 넘었다. 장진희 한국노총 전략조정본부 국장은 "직장 괴롭힘 피해자의 70%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퇴사, 휴직을 고민하고 있다"면서 "특히 소규모 사업장은 사업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적절한 보호를 받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국노총과 한국괴롭힘학회 등은 이날 국회의원회관에서 토론회를 열어 이 같은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국제노동기구(ILO) 190호 협약'을 비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2019년 만들어진 ILO 190호 협약은 '일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이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확인한 내용이다. 현재 프랑스, 독일, 호주 등 ILO 회원국 44개 국가가 비준했다.
190호 협약 비준국은 해당 국가의 대표적 노사단체와 협의를 통해 직장 내 괴롭힘 예방 및 감시 대책, 적절한 구제책 등 통합적인 접근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을 적용받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 직원은 물론이고 수습사원, 자원봉사자, 구직자 모두가 보호 대상이 된다. 우리나라가 협약을 비준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하고 체계적인 괴롭힘 방지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토론회에 참석한 윤혜정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연구원은 "현재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 특수형태근로자와 하청근로자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며 "ILO 190호 협약 비준과 함께 괴롭힘 문제를 다루는 별도의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효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는 "ILO 190호 협약으로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들면 노동자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지킬 수 있다"며 "생산성 증가와 사회적 비용 절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ILO 190호 협약을 비준하기까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협약 비준 이후 보호해야 할 노동자 범위가 크게 늘어나는 만큼 기업 입장에선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정부와 국회도 기존 법체계와의 충돌 문제 등 따져볼 사안이 많다. 예를 들어 ILO 190호 협약을 준수하기 위해 별도의 괴롭힘 관련 법안을 만들 경우 기존의 남녀고용평등법, 근로기준법 등과 중복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이유로 문재인 정부도 ILO 협약 3건을 비준하면서도 190호 협약은 비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