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가도 된다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인천 인하대병원 1층 ‘첫 방문센터’에서 상담을 마친 70대 환자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긋 웃음 지었다. 고혈압 때문에 석 달마다 두 시간 걸려 외래 진료를 다녔는데 상태가 안정적이라 앞으로는 동네병원에서 약 처방을 받아 관리하기로 했다. 상담 간호사는 환자 거주지 인근 의원을 소개하며 “건강이 나빠지면 언제든 돌아와도 되니 안심하시라”고 다독였다.
요즘 인하대병원에서 가장 분주한 곳이 바로 첫 방문센터다. 진료의뢰서를 들고 찾아온 환자를 해당 진료과로 연결하고, 중등증·경증 환자를 지역 병의원으로 회송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올해 1~6월 외래 환자 회송은 월평균 700여 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0% 이상 증가했다. 수술과 치료를 마치고 회복을 위해 2차 병원이나 재활병원으로 인계되는 입원 환자 회송도 매달 300건이 넘는다. 굵은 장맛비가 쏟아진 16일에도 이른 아침부터 대기표 뽑는 ‘딩동’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전공의가 의대 증원에 반발해 대거 이탈한 이후 인하대병원 같은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응급환자 진료에 집중하고 위급하지 않은 환자는 종합병원이나 병의원으로 분산되면서 수십 년 왜곡됐던 의료전달체계가 바로잡히고 있다. ‘비정상’이 촉발한 ‘정상화’다. 정부는 9월부터 상급종합병원을 응급·중증·희소질환 진료 중심, 전문의 중심 구조로 전환하는 시범사업도 실시한다. 지금은 비상진료체계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머지않아 대한민국 의료의 ‘뉴 노멀’이 돼야 할 변화들이다.
의료계에서 인하대병원은 뉴 노멀의 선구자로 꼽힌다. 외래 환자를 줄여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지난해 7월 환자 회송을 전담하는 첫 방문센터를 신설했고, 최근 1년 반 동안 전문의 66명을 대거 영입해 필수의료 분야를 보강했다. 본연의 중증·고난도 진료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때마침 올해 1월 ‘중증진료체계 강화 시범사업’ 기관으로 선정되면서 구조 전환에 한층 탄력이 붙었다. 외래 감축 실적과 중증환자 치료 성과에 따라 보상도 받는다. 이택 인하대병원장은 “급속한 고령화와 의료비 지출 증가로 건강보험 재정이 고갈되기 시작하면 결국 병원이 망한다”며 “의료전달체계를 바로 세워야 의료 효율성이 높아져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의료전달체계의 핵심은 ‘협력’이다. 인하대병원은 시범사업에 앞서 인천 지역 16개 종합병원, 100여 개 병원을 포함해 경기 서북부 1,251개 의료기관과 진료 네트워크를 갖췄다. 고난도 치료를 요하지 않는 환자를 1, 2차 병원으로 보낼 때는 진료 연속성을 위해 진료 정보 기록도 제공한다. 협력병원 의료진 정기 교육, 진료과별 간담회, 환자 맞춤형 컨설팅도 한다. 그간 의료기관들이 환자를 놓고 무한 경쟁했다면, 지금은 시스템 아래 각자 기능에 맞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며 다 같이 환자를 돌봐야 한다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2차 병원에서 환자 상태가 악화될 경우에는 인하대병원으로 신속히 이송되도록 ‘패스트트랙’이 가동된다. 24시간 연결되는 인하대병원 교수 개인 전화번호 핫라인이 구축돼 있다. 실제로 올해 4월 중순 폐렴 치료를 마치고 2차 병원으로 갔던 80대 환자가 염증 수치가 상승하는 등 상태가 돌연 불안정해져 핫라인을 통해 인하대병원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위기를 넘긴 환자는 무사히 회복해 한 달 뒤 다시 2차 병원으로 옮겼다.
물론 애로 사항도 많다. 대형병원이 무조건 좋다는 그릇된 인식이 환자들한테 굳어진 탓이다. 전원을 완강히 거부하거나 때로 막무가내로 화를 내는 환자들을 설득하느라 회송 담당 간호사들은 종종 진땀을 빼곤 한다. 많은 대형병원이 맞닥뜨린 어려움이기도 하다. 이동렬 진료협력팀장은 “경증환자가 상급종합병원 이용 시 진료비와 약제비를 더 많이 부담하도록 했지만 쏠림을 막기엔 역부족”이라며 “합리적 의료 이용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필수의료·지역의료 회피가 우리 의료체계의 심각한 약점이 된 상황에서, 인하대병원의 발전 전략은 역발상적 접근으로 의료개혁 추진 방향에 시사점을 준다. 인하대병원이 변화를 택한 주요 동기는 입지 특성이었다. 명색이 수도권 대학병원이지만, 인천항과 고작 2.8㎞ 거리이고 인천국제공항은 차로 30분이면 닿을 정도로 외곽에 있다. 서울 시내 대형병원처럼 환자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곳은 아니란 얘기다. 병상 수(908개)와 전문의 수(259명) 등 인프라도 5대 상급종합병원 대비 30~50% 수준이라 “양이 아닌 질”로 승부를 봐야 했다.
수익성이 낮다고 외면받는 응급·중증진료 강화, 인하대병원이 찾아낸 첫 번째 해법이었다. 이 원장은 전체 입원환자 중 40%가 응급실을 통해 들어온다는 점에 주목, 중환자를 잘 살리는 병원이 되기 위해서는 중환자를 맞이하는 첫 관문인 응급실이 튼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환자 초기 치료 역량이 올라가면, 환자를 최종 치료(배후 진료)하는 중환자실과 필수의료 진료과들이 만성적 인력 부족으로 인해 겪는 업무 과부담도 완화될 수 있다.
인하대병원은 응급실을 집중적으로 키웠다. 장비, 시설, 인력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현재 응급실 전담 전문의는 소아 응급 전담 전문의 8명을 포함해 총 26명에 달한다. 덕분에 응급실 환자 수가 수도권에서 서울아산병원 다음으로 많다. 병원 체급이 3배 차이 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다. 응급실로 전입한 중환자가 병원을 옮기지 않고 최종 치료를 마치는 비율도 99.7%로 국내 최고 수준이다. 백진휘 권역응급의료센터장은 “선제적 투자와 능동적 방향 전환 덕분에 전공의가 빠진 힘든 상황에서도 응급실 기능이 유지돼 환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평했다.
‘지역 중환자 진료 네트워크’도 구축했다.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환자는 시간이 걸리는 이송보다는 협진 체계 가동이 효율적일 수 있다. 서해 최북단 백령병원 응급실 환자와 인천의료원 중환자실 환자의 바이탈(활력 징후)까지 인하대병원에서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통합관제센터는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이 원장은 “지역 의료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선 병원 간 상생적 역할 분담과 긴밀한 소통,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도록 새로운 협의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두 번째 해법은 전문의 중심 병원 전환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개혁 방향과 일치한다. 하지만 전문의 중심 병원은 단순히 전문의를 많이 뽑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 원장은 “전문의가 하나의 회사처럼 환자 진료, 입원, 수술, 퇴원까지 자체적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문의 중심 병원”이라며 “그러기 위해선 회복기에 검사, 투약, 처치 같은 준전문 치료를 맡아 줄 진료지원(PA)간호사 등 지원 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인하대병원은 PA간호사를 3월 대비 2배 늘려 현재 202명을 확보하고 있다. 숙련도에 따라 담당 업무도 세분화했다. 전공의가 수련에 집중하도록 정부 정책도 바뀌고 있어 PA간호사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라고 이 원장은 강조했다.
변화는 상급종합병원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세부 목표나 로드맵은 다르지만, 중증환자 위주로 진료 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궁극적 지향점은 같다. 물론 갈 길은 아직 멀다. 상급종합병원의 중증환자 비율은 전공의 이탈 이후 3개월간 지난해 대비 39%에서 45%로 높아졌지만, 여전히 비중증환자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 상급종합병원이 진료비 수입의 40%가량을 외래 진료로 벌어들이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 정부는 상급종합병원이 중증·응급 진료의 본분에 충실하도록 성과 기반 보상체계를 도입하고 중환자실, 중증 수술 등의 수가를 대폭 강화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