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처음 재생에너지 계약을 체결할 때만 해도 전력회사들이 ‘정말 (이 비싼) 재생에너지를 살 거냐’고 되물었습니다. 공급도 부족해 매우 애를 먹었지만, 장기 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5일 일본 나가노현 엡손(EPSON) 히로오카 사무소에서 만난 가쓰미 기무라 지구환경전략추진실 부실장은 처음 재생에너지 조달을 위해 나섰던 6년 전을 이렇게 회고했다. 글로벌 프린터 제조기업인 엡손은 당시 다른 기업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고생길’을 택했다. 2018년 일본 전력 구성비에서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9%에 불과했기에 엡손의 의지도 머지않아 꺾일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엡손은 그러나 지난해 일본 국내는 물론 아시아와 유럽 등 세계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전력 84만2,837메가와트시(MWh)를 모두 재생에너지로 채웠다. 일본 제조기업 중 최초로 재생에너지(RE)100을 달성한 것이다. 한국 디스플레이·반도체 소재기업인 LG이노텍(87만2,537MWh)의 2022년 세계 사업장 소비전력과 비슷한 양이다.
엡손은 최근 나가노현, 지역 기업들과 함께 수력발전소를 개발하는 ‘신슈 그린 프로젝트’에도 투자를 시작했다. 일본 기업의 RE100 가입 증가로 재생에너지 조달 경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공급에 투자하는 것이다. 가쓰미 부실장은 “지금까진 해외 기업들이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청’하는 수준이었지만, 조만간 ‘요구’로 바뀔 것”이라며 “경쟁력을 지키려면 한발 앞서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50년까지 기업 사용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자’는 글로벌 RE100 캠페인은 2014년 출범 당시만 해도 산업계의 기후변화 대응을 활성화하자는 취지였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사실상 ‘무역 장벽’이 됐다. 수출중심 경제인 아시아 국가, 특히 제조업 비중이 큰 한국과 일본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더 커지고 있다. 영국 비영리단체 '탄소정보공개 프로젝트(CDP)'가 RE100 가입 기업들을 대상으로 RE100 여건을 조사한 결과, 한국과 일본은 ‘가장 장벽이 많은 나라’ 1, 2위에 각각 꼽혔다. 둘 다 재생에너지 발전량 자체가 적은 데다, 전력망으로 치면 고립된 섬이다 보니 유럽처럼 해외 조달도 어렵기 때문이다.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지만 양국 산업계의 대응 방식은 사뭇 다르다. 한국 기업들이 조용히 속앓이를 하는 것과 달리, 일본 기업들은 자국 내 재생에너지 조달을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정부를 향한 메시지도 명확하다. 지난달 25일 파나소닉, 기린홀딩스 등 88개 기업이 일본 정부에 ‘2035년까지 재생에너지 공급을 현재의 3배로 늘려달라’고 정책 제안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요구는 처음이 아니다. 2020년에는 소니, 소프트뱅크 등 92개 기업이 정부에 2030년 에너지기본계획의 재생에너지 비중 목표를 40~50%로 상향하라고 요구했고, 22~24%였던 목표가 36~38%로 수정됐다.
여기에는 249개 기업이 참여하는 경제단체 ‘일본 기후리더 파트너십(JCLP)’이 핵심 역할을 했다. 지난 3일 도쿄에서 만난 JCLP의 부의장 아베 사토시 리코(RICOH) ESG센터장은 “일본에서도 약 10년 전엔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 같은 업계 단체의 영향이 강해 재생에너지 관련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며 “2015년 파리협정 등 국제사회의 변화가 뚜렷해지면서 탈탄소 대응 시급성을 느낀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2017년 RE100에 가입한 프린터·디지털카메라 제조업체 리코가 JCLP 활동을 주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베 센터장은 “수요자인 기업이 나서서 재생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요구해야 정부도 전력업계도 확신을 갖고 공급에 나선다”며 “덕분에 최근 관련 시장도 크게 성장했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들도 위기의식은 크다. 해외 고객사들의 공급망 탈탄소화 요구가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학 분야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지난해 1월부터 독일 공급망실사법이 시행되면서 독일 고객사들로부터 ‘빠른 시일 내에 탄소 배출량을 산정하고 궁극적으로 재생에너지 100% 사용에 동참하라’는 요구를 받았다”며 “국내 재생에너지 조달 비용이 독일의 두 배나 되는 현 상황에서는 결국 우리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며 우려했다.
일본 기업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배경에는 중요한 제도적 차이가 있다. 전력시장이 한국전력 독점 구조인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2016년 전면 개방됐다. 일본 전력시장은 1995년 발전시장 자유화를 시작으로 2001년 대형 수요자 대상 소매자유화, 2016년 전면 소매자유화까지 차근차근 변화했다. 각 지역 전력회사가 수요에 맞춰 다양한 방식의 발전원을 개발하고, 기업들도 전력을 구매할 때 재생에너지를 선택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재생에너지가 여전히 화석연료보다 비싸지만, 경쟁을 통해 가격이 점차 안정화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경직된 전력시장은 기업들을 침묵하게 한다. 전원 공급도 정부의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중심으로 결정되니 변화의 여지가 적다. 조영준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연구원장은 “기업들도 재생에너지가 더 필요하고 너무 비싸다고 여기지만, 정부가 전력 계획을 좌우하고 모든 사업이 한전 중심인 현 체제에선 말을 못 하고 눈치만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국 기업들은 결국 해외에서 자구책을 찾고 있다. RE100에 가입한 비철금속 제련기업 고려아연은 재생에너지 인프라가 갖춰진 호주로 눈을 돌렸다. 호주 퀸즐랜드주에서 운영해온 아연 제련소(썬메탈) 인근에 2018년 자체 대규모 태양광발전소(125MW 규모)를 건설해 사용전력의 20% 이상을 조달하고 있다. 또 지난 4월에는 해외 자회사 아크에너지의 풍력발전소 지분 30%를 인수해 자금을 지원했다. 고려아연은 이 풍력발전소 발전용량(923.4MW) 중 30%를 썬메탈에 공급할 계획이다. 썬메탈 연간 사용전력량의 약 21.8%에 해당하는 양이다. 썬메탈은 이로써 사용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태양광과 풍력이 만든 전기로 채우게 됐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한국에서 재생에너지로 제련소를 운영하면 비용 측면에서 상당히 부담되는 반면, 호주는 태양광, 풍력발전 인프라가 갖춰져 있어 RE100 달성에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고려아연은 궁극적으로 호주에서 생산한 재생에너지로 그린수소1를 만들어 국내 RE100 달성에 이용한다는 계획이다.
※'2050년 RE100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인터랙티브에서 재생에너지의 국내 잠재량 및 각 발전원별 미래 단가 변동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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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SNU 팩트체크 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